푸르름,황토빛,돌빛의 색깔여행을 마치며...
폐사지
산야에 눈을 두고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반가운 것들이 눈에 띄곤 했는데
지천으로 널린 밤꽃이 그렇고 들녘에 널부러진 망초꽃이 그렇고 파란
하늘에 군데군데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 또한 전에 없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아카시아 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든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올 봄에 남도로 여행을 할 때 대나무가 모조리 말라 죽은걸 봤는데
이즈음에 아카시아가 온통 노란 단풍으로 물드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요?
때에 맞지 않은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닐텐데 아무래도 걱정거리가
또 하나 늘어날 것만 같습니다.
대나무가 그렇게 되고서도 나랏님이 어떻다느니 국운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말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런 후로 엊그제 서울 부암동을 답사했는데
여기서도 아카시아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냥 비가
안와서 그런거라 생각하면 간단할텐데...ㅎㅎㅎ
원종대사혜진탑(보물7호)
한참을 조는 듯이 상념에 잠기다보니 어느덧 고달사지에 도착했습니다.
고달사지는 부도(국보4호) 하나만을 보기 위해서라도 오는 곳입니다.
저 역시 몇년전에 부도를 보러 한 여름에 왔었는데 그 때는 부도로 오르는
길이 험해서 수풀을 헤치고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원종대사 부도(보물7호)인데 웅장하고 섬세한
팔각원당형 부도입니다. 이 부도는 위에 있는 고달사지 부도를 본 뜬 것인데
기단부에 있는 거북이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고 탑신은 4면에는 문모양을,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새겼습니다.
고달사지 부도와 거의 유사하지만 조각 솜씨가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봐
후대의 것으로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앞쪽의 귀부의 머리가 고달사지
부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봐 이 부도의 주인공이 고달사지 부도의
주인공보다 격이 낮을 것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답사기를 쓰게 되면 문화유적지나 유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을
안쓸 수 없지만 이걸 쓰다보면 밋밋해지고 길이가 길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한 꼭 소개해야할 사항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답사시에
설명을 듣거나 책자로 확인하실 수 있기 때문에 세세한 설명은 생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중요한 것을 빼놓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너른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고달사지 부도(국보4호)
바로 위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우리나라 부도 중 가장 크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고달사지 부도(국보4호)를 만나게 됩니다. 주최측에서 일행들을 부도
앞에 앉게 하시고 한참동안 부도탑을 바라보면서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는데 정말로 독특한 발상이며 아주 좋은 감상법이라 생각되어 다른데
에서도 써먹어볼 요량으로 저도 잠시 앉아 탑을 감상했습니다.
부도탑 앞에 배례석이 있는데 그 앞에 앉아 바라보는 고달사지 부도는
아름다우면서도 저절로 마음을 다잡는 기운이 감도는듯 했습니다. 뭔가
소리를 내어서는 안될것 같고 조용히 침잠해야 되는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그래도 저는 연신 카메라를 눌렀는데 이번에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고달사지 부도의 비천상
고달사지 부도의 깨진 지붕돌
우선은 부도의 지붕돌 밑 안쪽 깊은 곳에 비천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안보여 못봤는데 누군가가 탁본을 하였는지 까맣게 색이
입혀져 있어서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조각이었습니다.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도의 지붕돌이 반으로 갈라져서 그걸 붙였더군요.
아울러 지붕돌 모서리에 있는 꽃조각도 떨어져서 붙여 놓았더라구요...
몇년전에 뉴스에서 도굴범이 탑을 쓰러뜨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
그때 입은 상처 같았습니다.
천년을 버텨온 탑조차도 인간의 욕심 앞에서는 나약한 돌에 지나지 않고
한 순간에 파괴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문화재를
보호하고 도굴범의 근접을 막기 위해서라도 발굴작업을 통해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공포해야 안전할 듯 합니다. 예전에 석가탑도
도굴범들이 무너뜨렸고 무덤이란 무덤은 죄다 파헤치고 이제는 바닷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도자기까지 정말 도굴범의 활동무대와 능력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쪽으로 역량을 활용하면 나라의 보배가 될
터인데...
고달사지 부도에 심취해 넋을 놓고 감상하고 계신 일행분들을 다시금
폐사지에 있는 석조물을 향해 가자고 하니 힘드신 모양입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펼쳐 상당한 거리를 걸어서 답사를 하셨으니
많이 힘이 드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어느 답사회와 함께하든 답사
일정은 빠듯하게 계획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주최측에서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답사회도 예외는 아닌듯 싶습니다.
이번에도 여러 곳을 답사했는데 저는 참으로 좋았지만 힘드신 분들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6호)
이밖에도 고달사지에는 석조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윗쪽에서 보았던 원종대사 부도(보물7호)와 한 짝을 이루는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인데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비몸은 깨진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며
머릿돌은 구름과 용무늬가 생동감이 넘칩니다.
고달사지 석불좌(보물8호)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는 사각형의 거대한 대좌인데 불상은 없어
졌지만 그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한편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국립중앙박물관 복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직은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좀 어수선하지만 고달사지는 엄청나게
넓은 터에 자리잡았던 대가람의 면모를 서서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발굴조사가 끝나는 때가 기대됩니다...
고달사지(사적382호)
고달사지를 끝으로 오늘의 답사는 끝을 냈습니다.
푸른 숲 맑은 물이 있는 치악산 구룡사!
박경리 소설의 고향 토지문학공원!
천년의 숨결이 묻어나는 법천사지, 거돈사지, 고달사지!
하나 같이 놓치기 아쉬운 우리 문화의 보배들이라 생각이 듭니다.
폐사지의 멋은 가을에 누렇게 변한 황량함 속에서 석조물을 바라보는
멋이라고 했으니 올 가을에는 이번에 못가본 곳까지 포함해서 다시한번
길을 나서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푸르름과 황토빛과 대리석 돌빛이 어우러진
색깔여행을 하고 온 듯 합니다.
러시아 보트킨스키 태생인 발레음악과 교향곡의 대가
차이코프스키(Pyotr Il'ich Chaikovskii)의 피아노 곡
'사계'중 '6월 뱃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