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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박문수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5. 10:00
박문수 묘
천안은 묘지 답사의 기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인 묘가 많고 풍수적으로 특이한 묘도 많아서 풍수답사를 많이 하는 곳이다. 능원묘 답사 팀도 수시로 가는 곳 중의 한 곳이지만 매번 이러저런 이유로 인연이 닿지않아 맘 먹고 다녀온 곳이다. 지난 봄에 다녀온 곳이지만 답사기는 한 여름에 올리게 되었다.
박문수는 어사 박문수로 더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산 정상 부위에 있으면서 멀리 병천장터를 바라보고 있어 흔히 장군대좌형이라 일컫는 곳입니다. 그 형세야 뭐라하든 물형론에서는 말을 참 잘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물형론에 대한 책이 변변한게 없다. 공부를 하려해도 마땅한 것이 없다.
내가 언제가 이 물형론, 형국론에 대해 꼭 책 한 권 남기고 싶다. 형국만 나오면 참으로 답답해 진다. 박문수 묘는 장군만 있고 병졸이 없어서 병천시장을 만들어 병졸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가도록 했다는 것이 주 요지다. 설령 그렇게 했다하더라도 인위적인 냄새가 많이 풍긴다.
산룡지에 쓴 묘들은 높다보니 바람을 조심해야 하는데 따라서 주위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지 않으면 좋은 자리라 볼 수 없다. 이곳은 급하게 묘역만 둘러보고 오느라 풍수적 관찰을 자세히 하지 못하였지만 좌우 용호는 바짝 붙어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 발아래로 조안산이 켜켜이 놓여 있어 눈맛은 좋았지만 앞쪽에서 오는 바람은 막을 길이 없는 것 같다.
박문수(朴文秀)
1691년(숙종 17)∼1756년(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의 증손이고, 세마(洗馬) 박선(朴銑)의 손자로,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의 아들이며, 모친은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고,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으며,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하여졌다. 같은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조 자체 내의 인신(印信)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入送)에 불편을 줄 뿐 아니라, 중간에 간리(奸吏)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은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음을 들어 병조판서의 인신과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줄 것을 주청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당하였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되었으며,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국가에서 대내(大內)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하였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영조대의 탕평책(蕩平策)이 실시될 때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다른 신하들과 함께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각전각궁공상정례(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尙方定例)》 3권을 합한 것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박문수
조선 역대의 어사중 유일한 일화를 남긴 박문수는 본관이 고령으로 1691년(숙종 17)에 태어나 1756년(영조 32)에 56세로 졸했다.
자는 성보이고 호는 기은이다. 1723년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고 1728년 (영조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는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군이 되었다.
1929년(영조5) 영남절도사로 있을때 관북(함경도지방)지방의 수재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었던 조 3천석을 미리 관북지방으로 발송하여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미리 구했으므로 함흥으로 만세교 옆에 북민비, 송덕비가 세워졌다.
묘는 북면 은석산의 정상부에 있고 묘비와 상석 그리고 장군석이 현존하고 있다. 묘의 높이는 2.3m이고 둘레는 12m이며 묘역은 사방 60보이다. .
<천안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충남 문화재자료 261호
문화재명칭
박문수 묘
소재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온지리 산1-1
관리자(연락처)
고령박씨
▼ 박문수 묘를 가려면 은석사를 거치게 된다...
▼ 박문수 묘 가는 이정표...
▼ 박문수 묘는 옆구리로 들어선다.
▼ 박문수 묘 안내판
▼ 박문수 묘 전경.. 묘 앞에 돌이 많다... 자연석이라기 보다는 묘앞 단을 쌓은 것이 무너져 내린듯...
▼ 박문수 묘 전경
▼ 박문수 묘 청룡쪽...
▼ 박문수 묘 근경
▼ 박문수 묘비... 묘비 한쪽을 비워놓은 것은... 아마도 부인과 합장을 하려했겠지만... 왜 부인 묘는
이곳에 오지 못하고 비워져 있을까?
▼ 박문수 묘 석물... 망주석과 무인석이 있다.
▼ 박문수 묘 석물.. 무인석은 조선시대 때 민묘에는 세울 수 없었던 만큼 한참후에 후손들이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 박문수 묘 무인석
▼ 박문수 묘 백호쪽 석물..
▼ 박문수 묘 백호쪽 석물
▼ 박문수 묘 입수도두.. 횡맥으로 보이는데 현무봉까지 올라가보지 못했다..
▼ 박문수 묘 입수도두...
▼ 박문수 묘 후경.. 멀리 마을이 있는 곳이 병천장터이다.
▼ 박문수 묘 청룡,백호쪽 후경
▼ 박문수 묘는 은석사를 거쳐 가야한다.. 내려오면서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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