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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성남]만회 권득기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8. 10. 10:00

    만회 권득기 묘

    성남시에는 의외로 많은 선현묘지가 있다. 이곳은 문화재로 지정된 묘지 외에도 여러 묘를 답사할 수 있는데

    성남시에서 다른 지자체에서는 아직도 갖추지 못한 디지털문화대전사이트를 일찌감치 갖춰놓아서 답사객들이

    쉽게 자료를 접근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다시한번 성남시 문화관광 담당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곳 권득기 묘는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부근에 자리잡은 안동권씨 선산 묘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이런 묘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디지털문화대전 덕택에 알게 되었다. 서울 인근을 답사하다보면 산세가 조금이라도

    그럴듯해 보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선현 묘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만큼 묘자리가 부족했다는 뜻도 되고

    조금이라도 괜찮은 곳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사대부들의 묘자리로 편입되었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 세간에 나도는

    명당은 더이상 없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권득기(權得己)
    1570년(선조 3)∼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1]).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
    조부는 종묘서령 권덕유(權德裕)이며, 부친은 예조판서 권극례(權克禮)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 권극관(權克寬)에게 입양하였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1618년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죽은 뒤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회집》‧《연송잡기(然松雜記)》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권득기 묘
       경기도 성남분당구 금곡동 35-6(재실 뒷편)
      안동권씨 만회공파 종중회

     

     

     

     

     

     

     

     

     

     

    권득기 묘 및 묘갈
    권득기[1570~1622]는 광해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중지(重之)이며 호는 만회(晩悔)이다.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 권순(權循)의 6세손이자 우참찬(右參贊) 권극례(權克禮)[1513~1590]의 아들이나 숙부(叔父)인 증좌승지(贈左承旨) 권극관(權克寬)[1546~1613]에게 입양되었다. 현종대의 대학자로 이름난 탄옹(炭翁) 권시(權諰)[1604~1672]가 아들이고 영의정을 지낸 만사(晩沙) 심지원(沈之源)[1593~1662]이 사위이다.
    1589년(선조22) 진사(進士)가 된 후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가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지내고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2)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태안(泰安)으로 낙향(落鄕), 은둔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학문이 높고 행실이 돈독(敦篤)하여 일세(一世)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며 저서로 『만회집(晩晦集)』·『연송잡기(然松雜記)』가 있다.

    권득기 묘는 금곡동 쇳골 마을의 북쪽 구릉 중턱에 남향(南向)하여 있는 여러 기의 묘 중 제일 상단에 위치하며, 묘 앞으로 분당 시내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봉분 오른쪽의 옛 묘갈은 1660년(현종1)에 조성하였고, 1993년에 신도비를 새로 건립하였다.
    증정부인전주이씨(贈貞夫人全州李氏)와의 합장묘로, 묘역에는 각종 석물이 설치되어 있으나 근래 또는 최근에 추가로 설치한 것이며 옛 석물은 남아 있지 않다.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를 갖추었으며, 크기는 동서 직경 540㎝, 높이 190㎝이다. 봉분 중앙에는 혼유석·상석과 4각 향로석 2기·좌우에 구신(舊新) 묘갈 2기·8각 망주석과 금관조복형의 문인석을 각각 2기씩 갖추고 있다. 상석은 문고리모양이 4면에 양각된 고석 2개가 받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32㎝·너비 138㎝·두께 91㎝이다.
    봉분의 오른쪽에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의 옛 묘갈(높이 129.5㎝)이 건립되어 있다. 방부의 윗면에는 복련(覆蓮)을 장식하였지만, 아랫면은 매몰된 상태이다. 백대리석의 비신(碑身) 앞면에 묘에 묻힌 사람의 신원을 단정한 해서(楷書)로 쓰고, 그 상단에 가로로 전액(篆額)을 올려 놓았다.
    비신(높이116.5㎝)에는 누가 쓴 것인지 밝히지 않았으나, 족보에는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의 작품으로 나와 있다. 육안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미수체(眉叟體)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有明朝鮮□□墓碣(유명조선□□묘갈)”이라고 밖에 해석이 안 되는 실정이다. 또한 뒷면에 기록한 묘갈문은 사위 심지원(沈之源)[1593~1662]이 짓고, 전목사(前牧使) 정시성(鄭始成)이 소해(小楷)로 정성들여 썼다. 비신의 오른쪽에 새긴 연대로 보면, 1660년(현종1)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약간 마모되었으나 판독은 가능한 상태이다.

    한편 봉분의 좌측에는 구묘갈이 남향하여 비좌와 비신 월두형으로 있다, 비좌는 전후 5엽, 좌우 1엽씩의 단판복련문이 있다. 비신의 비문은 전·후·좌(前·後·左) 3면에 있으며, 전면상단에는 전서(篆書)로 ‘晩悔權公墓碣銘’(만회권공묘갈명)과 세로 3열로 ‘朝奉大夫行禮曹佐郞贈嘉善大夫吏曹參判權公得己之墓 贈貞夫人全州李氏祔葬’(조봉대부행예조좌랑증가선대부이조참판권공득기지묘 증정부인전주이씨부장)의 비문이 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한 편인데, 자서 영의정(子壻 領議政) 심지원(沈之源)이 찬하고, 파평후인(坡平后人) 윤정중(尹正重)이 서와 전을 하였으며, 다시 서병전(書幷篆)하여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개수(改修)한 것이다. 크기는 비좌 높이 14㎝·너비 90㎝·두께 52㎝, 비신 높이 117㎝·너비 상(上) 56㎝·하(下) 51㎝·두께 16㎝ 이다. 그리고 묘역 입구의 흥모재(興慕齋) 옆에는 1993년에 세운 장대한 규모의 신도비가 서 있다.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동권씨 만회공파 종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인용>

     

     

     

     

     

     

     

     

     

     

     

     

     

     

     

     

     

     

     

     

     

     

     

     

     

     

     

     

     

     

     

     

     

     

     

     

     

     

     

    ▼ 만회 권득기 묘갈. 

    ▼ 만회 권득기 묘갈 전경

    ▼ 안동권씨 만회공파 재실

    ▼ 담장 너머로 본 재실

    ▼ 만회 권득기 묘 전경.. 재실 뒷쪽 일렬로 된 산소 맨 윗쪽에 위치해 있다.

    ▼ 만회 권득기 묘

    ▼ 만회 권득기 묘비

    ▼ 만회 권득기 묘표

    ▼ 만회 권득기 묘 석물

    ▼ 만회 권득기 묘 청룡쪽, 백호쪽 후경

    ▼ 만회 권득기 묘 후경...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안산이 잘 감싸주고 있었겠다. 지금도

    장풍을 잘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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