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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화성]추연 우성전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8. 11. 10:00

    추연 우성전 묘

     

    화성의 묘지 답사 때 수성최씨 묘를 답사할 때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우성전 묘역이 인근에

    있는데 입구에 신도비가 보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올라가야 우성전 묘가 있다. 해가 벌써 넘어가고

    묘역이 동향이라 해가 빨리 진다. 사진이 까맣게 나와서 제대로 된 것이 없어 보인다.

    7대손 우하영 선생 묘가 인근에 있다고 되어있는데 날이 어두워 더이상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우성전(禹性傳)
    1542년(중종 37)∼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현령 우언겸(禹彦謙)의 아들이며, 대사헌 허엽(許曄)의 사위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4년 보우(普雨)를 주살할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예문관봉교‧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고 1576년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으나, 그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사헌부장령‧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가 되고 뒤에 여러 번 의정부사인을 역임하였다.
    동서분당 때 동인으로 분류되었고, 그뒤 이발(李潑)과 틈이 생겨 그는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서인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좌되어 북인에게 배척되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군호(軍號)를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해염(海鹽)과 식량을 조달하여 난민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하여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하여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로를 차단하였으며,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그 공으로 봉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었다.
    그뒤 계속 활약,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하여 관군과 의군의 자량을 삼게 하였다.
    그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갑록(癸甲錄)》‧《역설(易說)》‧《이기설(理氣說)》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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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경기도 문화재자료 121호
       추연 우성전 묘역(우하영 묘역 포함)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78-1
      단양우씨

     

     

     

     

     

     

     

     

     

     

    우성전(禹性傳)
    우성전〔禹性傳, 1542년(중종 37)~1593년(선조 26)〕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문신·의병장(義兵將)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이다. 연안부사(延安府使) 수(樹)의 손자이고 함종현령(咸從縣令) 언겸(彦謙)의 아들이며 허엽(許曄)의 사위이다.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준겸(俊謙)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진사(進士)가 되고, 1564년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당시 정치에 개입하던 승(僧) 보우(普雨)를 참수(斬首)할 것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검열·봉교·수찬을 역임하였다. 1576년(선조 9)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수원현감(水原縣監)으로 나가 적폐(積弊)를 일소하고 교화로서 선정을 베풀어 읍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그 후 경연에 들어가 수찬·전한·사헌부장령·사옹원정(司饔院正) 등을 역임하였고 1583년 응교를 지냈으며 뒤에 여러 번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지냈다. 이후 성균관사성(司成)을 거쳐 외직으로 강화부사(江華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동인(東人)의 영수(領袖) 허엽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만큼 동인의 맹장(猛將)으로 활약했으며, 관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583년(선조 16) 이래 대두된 당파의 분열에서 서인(西人) 세력을 대응함에 있어서 공서파(攻西派)에 가담하지 않고 공평한 입장에서 이를 조정함으로써 유성룡과 함께 온건파를 대변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동인이 남(南)·북인(北人)으로 분열될 때 남인의 거두가 되어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 등의 북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 뒤 1591년(선조 24) 대간에서 정철(鄭澈)의 죄를 논하려 할 때 홍문관부제학 김수(金粹)에게 논쟁을 확대하지 말도록 만류한 바 있었는데,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이것을 간교한 정철에게 아부한 것이라 모함하여 마침내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수원 향리로 퇴거(退居)하여 학문에 힘쓰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고지인 경기지방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하여 도처에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성균관대사성에 특진되었다. 특히 김포의 바닷가에 채를 만들고 주둔하면서 바닷물을 다려 소금을 만들고 군량을 마련하니 유민도 또한 이에 힘입은 바 많았고 체찰부에서는 이를 본받아 제도화하기도하였다. 1593년(선조 26) 평양의 전첩(戰捷)에서 패한 왜적들이 서울로 도망쳐오자 용산(龍山)에 있던 주사(舟師) 김천일·이빈(李) 등과 협력하여 서울을 수복하는데 원조하고, 도망치는 적을 섬멸하면서 의령(宜寧)까지 추격하였다. 그 와중에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수레에 몸을 싣고 돌아오던 중 7월 19일 부평(富平)의 노상에서 별세하였다.
      1788년(정조 12) 경기지방의 유림들이 임금의 행차 길에 학행과 절의가 뛰어났던 그에게 증직할 것을 요청하자 정조께서 “우성전은 학행과 절의가 두루 탁연하였는데 아직까지 영증(榮贈)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전이라 하겠다. 3품에 시호를 내리는 것은 전례가 없으나 품계를 높이고 증직을 더한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랴? 특별히 증시의 은전을 베풀어 사림의 소망에 부응하게 하라.”고 하고 이조참판에 증직하였다. 2년 후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내렸다. 동문 동갑의 친우 유성룡이 추연의 『계갑일록(癸甲日錄)』 후서(後敍)에서 “안목이 당세(當世)에 가장 높아 원망을 많이 샀고, 길이 험난하고 곤궁했으나 끝까지 변치 않고 죽었다”고 썼듯이 도학과 절의, 그리고 원대한 경륜을 아울러 갖춘 대학자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자로서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으나 상당 부분 일실되었다. 현존하는 저술로는 『계갑일록』과 퇴계의 언행을 기록한 『추연수록(秋淵手錄)』이 있고, 성리론에 대한 견해를 밝힌 『이기설(理氣說)』, 『역설(易說)』 등이 있다. 묘는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능골에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그의 묘는 우성전의 직계 7대손인 18세기 말의 실학자 우하영(禹夏永)의 묘와 함께 2003년 4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묘소 입구에는 남인계의 후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위치해 있다. 묘소는 단양우씨 묘역의 최상단에 있어 월장(越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 묘표 등을 갖추었다.

    <화성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추연 우성전 묘역 입구 

    ▼ 추연 우성전 신도비... 마을 입구에 있다.

    ▼ 추연 우성전 묘역입구에서 바라본 수성최씨 묘역...

    ▼ 추연 우성전 묘 안내판

    ▼ 추연 우성전 묘 전경

    ▼ 추연 우성전 묘

    ▼ 추연 우성전 묘표

    ▼ 추연 우성전 묘 석물

     

    ▼ 추연 우성전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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