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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여주]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3. 4. 20. 10:00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여주는 세종대왕 영릉이 있고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어 어릴 때부터 수시로 드나들던 곳인데

    근자에 능원묘 답사로 자주 드나들던 곳 중의 한 곳이다. 그런데도 워낙에 묘가 많고 사연이

    많이 있는 곳이라 다 돌아본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조금씩 답사를 했었는데...

    얼마전에 맘먹고 한꺼번에 돌아보고자 후배하고 두번에 걸쳐 다녀온 곳이다. 그래봤자

    몇군데 못보고 왔지만 아직도 다녀와야 할 곳이 너무 많은 곳이 여주지역이다.

    명성황후생가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상스럽게 내게는 꼭 가보고 싶다는 의욕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내 맘속에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적 느낌이 조선말의 두 주역 흥선대원군과

    민비(요즘 이렇게 썼다가는 인터넷에서 몰매 맞기 십상이다, 명성황후라고 또박또박 써야

    그냥 넘어간다)에 대한 애증의 발로이리라...

    그래서 흥선대원군도 보기 싫고 명성황후도 보기 싫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은 곳이었다.

    몇 년 전에 민유중 신도비는 갔다왔어도 그 옆에 있는 생가는 들어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명성황후 뮤지컬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할 정도로 많이

    알려져서 이제는 그곳을 안가보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매번 도로가에서

    지나쳐 버렸던 명성황후 생가를 다녀왔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아미사 사격을 공부하러 많이 가는 곳이다. 아미사는 그곳에서 왕비가

    태어난다는 사격이다. 그래서 나 역시도 멀리서 아미사만 보고 떠난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번에는 생가 안채와 사랑채 등을 모두 둘러보고 나왔다. 새삼 느낀거지만 문화재를

    정비하면서 너무나 넓게 생가를 확장한게 아닌가 하고 질의해 본다.

    명성황후(明成皇后)생가

    조선 제26대 고종(高宗, 1864~1907) 황제의 황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을미사변으로 일인(日人)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 왕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복원하였으며,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한 방이 있던 자리에 그녀의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즉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고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여주군史에서 인용>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철종 2)∼1895(고종 32).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
    흔히 민비(閔妃)로 불린다.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민치록(閔致祿)이다.
    여덟 살의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민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을 종식시키기 위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이고자 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수완이 능란한 민비는 입궁한 지 몇 년이 지나자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민비가 대원군과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공작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민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였다.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政敵 : 조성하를 중심으로 한 조대비 세력, 조두순·이유원 등 노대신 세력, 김병국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재면과 형 이최응 세력 및 최익현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는데 성공해서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
    대원군의 실각 후 민비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 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민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해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였다.
    출동한 청국군은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였다. 다시 집권한 민비와 민씨 세력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와 대립하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당 정부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으나 청국 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부터 민비는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났을 때 묄렌도르프(Mllendorf,P.G.)를 일본에 파견해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여 유연성 있게 대처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적극적인 침략 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민비 세력을 거세하려고 하였다. 민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배후에 있는 개화 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사세가 불리해진 민비는 친러정책을 내세웠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민비와 척족 및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1895년 8월, 일본 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해 민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민비는 나이 45세로 살해되어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당시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右崗)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897년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되고 난 뒤 11월 양주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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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여흥민씨


     

     

     

     

     

     

     

     

     

    **민유중, 민치록(명성황후 부친) 가계도
    민기   민광훈     민시중
     
     
      민정중
    (좌의정)
      민진장
    (우의정)
     
     
      민유중
    (숙종국구)
      민진후   민익수   민백분   민기현   민치록
    (고종국구)
         
     
      민진원
    (우의정)
      민형수   민백상
    (우의정)
     
     
      민진영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건물과 뒤에 보이는 예쁜 아미사....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앞 마당에 있는 하마비...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안내판...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안내판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안내도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전경.. 양택은 이렇듯 대칭적인 배치가 기를 모으는데 좋다.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솟을문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내부... 건축적인 식견이 부족하여 안채인지, 사랑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진만 올린다.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안채... 이곳에 명성황후의 영정이 전시되어 있다.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안채에 모셔진 명성황후 영정...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밖...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원경...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측후경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후경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후경... 민유중 묘소를 올라가는 길에 찍은 것이다.

     

     

    ▼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옆에 있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각...

    ▼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각 입구

    ▼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안내문...

    ▼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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