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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17)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1. 8. 10:00

     

    표 석 명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임시관리번호

    종로17

    설치연도

    1992

    표석문안

    이 일대는 병자호란 당시 화의(和議)를 반대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집이 있던 곳으로, 그 후 안동(安東) 김씨가의 세거지(勢居地)가 되었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궁정동17-4

    찾아가는 길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 담을 타고 북쪽으로 약1km를 가면 청와대사랑채가 나옴-->무궁화동산 맨 안쪽에 시비와 함께 있음

    관계되는 내용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상용(尙容)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 썼다. 저서에 〈청음집〉·〈야인담록 野人談錄〉·〈풍악문답 豊岳問答〉 등이 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61년 효종 묘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서 인용> 

     

    ▼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표석

     김상헌선생은 시조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안동김씨의 핵심 인물이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의를 반대하고 주전론을 편 인물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사에 둔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런 반대파는 항상 존재하고 어떤 때는 오히려 더 추앙을 받는다. 이곳이 그 유명한 10.26이 일어난 궁정동터다. 터의 이력은 항상 존재한다. 좋은 터에서 좋은 기운이 나온다.

    ▼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표석은 시비와 나란히 있다.

    ▼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표석과 함께 있는 유명한 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표석... 무궁화가 한창 필 때 찾았고 올 한 해에만 5~6번은 찾은 것 같다.

    ▼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표석은 무궁화동산 안쪽에 간이 성곽을 만들어 놓은 곳에 있다.

    ▼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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