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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19)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1. 11. 10:00

     

    표 석 명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임시관리번호

    종로19

    설치연도

    1992

    표석문안

    조선말 개화파의 지도자인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이 거처하며 갑신정변을 논의하던 집 터(종로구 화동 260번지)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화동 260번지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100m 풍문여고 정문 우회전-->430m 직진하면 정독도서관 입구-->정독도서관 화단에 위치

    관계되는 내용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의 정치인이다. 인조 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김병태의 장남으로 7세에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성장하였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사 시찰단이 되어 일본에 다녀와 개화 문물을 체험한 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져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해 개혁을 꾀했다.
    양아버지 김병기를 따라 강릉에서 율곡 학파의 서당에서 학문을 접하고 1870년 초부터는 유대치, 박규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1879년에 이동인을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한 뒤 1881년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이조참의·호조참판·외무아문협판 등을 역임하며 개화파의 확산에 힘썼다. 1883년 6월에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1884년 초부터 박영효 등과 정변을 기도, 그해 12월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갑신정변 실패한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894년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년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순종 때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급진개화파로서 1884년 초부터 갑신정변을 계획, 주도하였다.[2] 그는 1883년(고종 20년) 4월 독도에 주민을 입주시켜 독도 유인도화 정책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시행케 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인용> 

     

     

    ▼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가 있는 정독도서관 입구

    정독도서관을 답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경기고등학교 시절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이런저런 이유로 못가본 곳을 2000년도 들어서 답사팀들과 함께 북촌을 찾았을 때 처음 가보았다. 그때 김옥균 집터가 그곳 운동장이었던 곳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화파들의 본거지가 북촌 일대였다. 박규수 집을 중심으로 홍영식 집도 그 일대에 모여 있다.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그의 집터를 보노라면 백악산에서 타고 내려온 맥이 그의 집터에서 웅크리고 기운을 응집시켜 산진처를 이루는듯 보인다. 그러나 지세가 높아 바람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아래 윤보선가를 보면 산진처가 어디가 되는지 알 수 있다.

    ▼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표석

    ▼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표석이 있는 정독도서관

    ▼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표석이 있다.

    ▼ 정독도서관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이다. 고목도 있다.

    ▼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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