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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62)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2. 4. 09:30

     

    표 석 명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임시관리번호

    종로62

    설치연도

    2003

    표석문안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경운동 47-1 전 건국대학교 건물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5번 출구-->300m 기린갤러리 앞 인도변

    관계되는 내용

    서북학회(西北學會)

     

    1908년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
    설립 목적과 취지는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사회진화론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서북학회 구성원들은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나 민족이 힘이 약한 나라나 민족을 침탈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나 약육강식 논리만이 적용되는 시대로 열패자인 약자는 실력양성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본 인식 위에 궁극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의 달성에 있었다. 민력양성을 위해 민력 결집은 시급한데, 방법은 단체설립과 단체 상호간의 단합으로 서북학회 설립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1908년 2월부터 『서북학회월보』라는 학보를 발간, 1910년 1월까지 계속하였다. 학보를 통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민권론(民權論)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단체론·애국론·교육구국론·실업진흥론·사회관습개혁론 등을 전달하여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민족산업진흥운동이 중요시된 것은 서북학회의 사회적 기반이 신흥시민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교육을 장려하고, 특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관련해 농림(農林)의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좀더 광범한 지역과 대중에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관지로는 『서우(西友)』를 계승한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가 있다. 1910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

     

    서북학회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표석 

    ▼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표석 

    ▼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표석... 건너편에 교동초등학교 정문이 있다.

    ▼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표석 위치<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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