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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 제1차 홈플풍수문화답사 결과...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4. 12. 21. 09:00
제1차 홈플풍수문화답사 결과
ㅇ 일시 : 2014.12.19(금)09:30~14:00
ㅇ 장소 : 도봉산역 서울 창포원~다락원터~유희경,이매창 시비~우암 송시열 도봉동문 각자~신정왕후(조대비)별장~도봉서원~김수영 시비~진주유씨 유양 묘~전주이씨 영해군 묘~영춘군 이인 묘~무수골
▼ 도봉지역 풍수문화답사 코스(지도 위의 숫자를 따라 답사 진행)
▼ 도봉지역 답사 기념 인증샷....
■1 서울 창포원(菖蒲園)
서울 창포원은 도봉구의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조성된 식물원으로, 도심 속의 아름다운 녹색 공간으로 건설되었다. 2006년 11월에 서울 창포원 조성 사업이 시작되어 2009년 6월 7일에 개장하였다.
세계 4대 꽃 중 하나로 꼽히는 붓꽃[iris]이 가득한 특수 식물원인 서울 창포원은 약 5만 2417㎡에 붓꽃원, 약용 식물원, 습지원 등 12개 테마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붓꽃원에는 노랑꽃창포, 부처붓꽃, 타레붓꽃, 범부채 등 ‘붓’ 모양의 꽃봉오리를 가진 붓꽃류 130여 종이 30만 본 심어져 있어 붓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약용 식물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용 식물의 대부분을 한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습지원에서는 각종 수생 식물과 습지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관찰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밖에도 지피 식물원, 허브원, 산림 생태 관찰원, 방문자 센터 등이 조성되어 있다.
▼ 도봉산역 2번출구로 나와서 만나는 서울 창포원...
▼ 서울 창포원은 서울둘레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2 누원점(樓院店): 다락원 터
도봉산 입구 자연마을인 안골이 있는데 이곳을 다락원이라 부른다. 다락원은 한자로 표기하면 누원(樓院)이 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사상도고(대규모 민간 도매상)들이 커다란 장시를 이루어 도성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던 중요한 거점이었다. 특히, 누원점(樓院店) 은 서울로 오는 곡식과 옷감 등을 나르는 길목으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물건을 사고 팔거나 상인들과 연결이 쉬어 상인들의 활동 중심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번성했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곳이 과거의 누원점 터였음을 알려주는 조그만 표지만이 있을 뿐이다.
▼ 도봉산역 건너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다락원 표석... 잘 눈에 띄지 않는다.
▼ 천축사 가는 길 시비...
■ 목필균 시인이 직접 쓴 '천축사 가는 길' 시비에 대한 글
천축사 가는 길
먼 산빛을 친구 삼아
도봉산에 오르면
천축사 가는 길은 열려 있다.젊은 까치 소리에 눈웃음 치고
이름 모를 풀꽃에도 손길을 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걸으면
노래하듯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오히려 내 갈 길을 재촉하니 재미있다.도봉산을 품어 안은
천축사의 끝없는 도량을 향해
일상의 상념들을 날려 보내면
근심은 바람 되어 맴돌다 사라진다.티끌 같은 몸뚱이에 자리 잡은
바위만한 욕심덩이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되돌아보는 시간.
천축사 가는 길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다.목필균 시, 강정화 증
이 시는 천축사 원타 스님께서 신도 강정화님의 도움으로 도봉산 입구에 시비(詩碑)로 세워진 시이다. 세워진 때는 1997년 12월인데, 동료 시인에 의해 글쓴이가 안 것은 다음 해 3월이었다.
세상은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매복되어 있어서 인생을 굴곡 있게 전개시키는 것인가 본다. 매복된 일들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상심하고 기뻐하는 일들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시비(詩碑)로 인해 처음에는 기쁨으로 놀라고, 그 다음에는 가슴에 부끄러운 가시로 남아있다.
벌써 7년 전인가보다. 42세가 되어서야 겨우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내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 소식은 시비가 세워진 일이다. 이는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우이시낭송회에서 산을 잘 다니는 어느 시인이 흥분된 목소리로 목필균 시인의 커다란 시비가 도봉산 입구에 세워졌다고 시낭송 차례에 알려주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무슨 말인가? 내 시가 시비로 세워지다니. 마침 그 자리에 당시의 도봉구청장 이었던 유천수님이 와 계셨다. 정말 너무나 엄청난 소식에 당혹해 하는 내게 그 분은 문화홍보과장을 보내 해명을 해 주셨다.제 1회 도봉산 축제 때 우이시인들이 초청을 받아 시낭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시를 원고로 보내고 시낭송을 했고, 구청장은 그 시가 마음에 들어 천축사 주지스님이셨던 원타스님께 시비로 세울 것을 의논하셨다고 한다. 원타스님은 그 때 병마에 시달린 몸과 절망적인 마음으로 가끔씩 천축사를 찾던 나를 잘 알고 계셨다. 더구나 그분이 발행하시던 ‘천축지’에도 발표했던 그 시에 대해 알고 계셨으므로 도봉구청장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도봉구청에서는 지금은 주차장 자리에 시비를 세울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했고, 천축사에서는 시비를 세우는 일체의 경비를 책임지기로 했다는 밀약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왜 난 전혀 몰랐을까?당시 천축사 주지 원타스님은 매우 진취적인 성향의 젊은 스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창동역 근처에 포교원까지 마련하시고 중생들 제도에 적극 나선 때였다. 그 때가 초창기라 무척 바쁜 상황이었고, 길게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시비 건립의 일들이 단독 보시를 하겠다고 나선 강정화불자님을 만나서 일의 진척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상 시비가 세워진 시점에 급작스레 부산 부암사로 떠나시게 된 것이다. 시비 건립이 완성되면 내게 연락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게으른 내가 천축사를 찾지 않았고, 그 시기를 놓친 결과이다.
결국 나는 놀라움, 기쁨, 민망함으로 범벅이 된 심정으로 시비를 확인하게 되었고, 친구들 몇이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돌아보니 세상에 이렇게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문단에 얼굴도 제대로 내밀지 못한 내가 거대한 돌덩이에 이름 석자가 박히고, 그리 잘 쓴 시도 아닌데 도봉산 입구에 버젓이 서 있을 수 있을까? 기라성 같은 원로시인님께는 민망하여 뵐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시비를 확인하고 며칠도 못되어서 친척들에게까지 함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난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문단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몸담고 있는 우이시 어른들은 물론 동료시인들께도 이 시비에 대한 이야기는 내 입으로 올려보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내온 4년이 지나서야 먼저 우이시 회장님께서 공식적인 행사 때 언급해 주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비가 그리 영광스럽지는 못하다. 지금 쓴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목필균, 그 건방진 놈, 아니 돈이 얼마나 많기에 자기 돈으로 시비를 세워!!!” 하며 시비(是非)를 거는 사람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이름이 남자 같고, 전혀도 무명하였기에 받은 오해이며, 너무나 거대한 돌에 새겨진 것이 화근이었지만 난들 어떻게 할 것인가?
늘 민망해 하는 나를 평소에 아껴주시던 박희진 시인께서 어느 날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시비에 적힌 목시인의 시는 평범한 작품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던져주신 메시지가 크다. 그래서 그 시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말씀에 오랫동안 민망함에 쳐진 어깨를 추슬렀다.도봉산 입구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난 소박한 불심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나 어려운 때 위로 받았던 천축사 가는 길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쓴 시가 시비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도 이젠 이 민망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 도봉산 입구에는 도봉산의 영봉들의 자태를 축소하여 그 모양을 세워 놓았다.
■3 유희경 이매창 시비(劉希慶 李梅窓 詩碑)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비록 하층민이었지만 양주 목사로서 도봉 서원을 건립한 남언경(南彦經)에게서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국상(國喪)에 자문할 정도로 예(禮)에 밝았으며 도봉 서원(道峯書院) 설립에도 간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품계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에까지 올랐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을 남겼다.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기생으로 황진이(黃眞伊),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힌다. 이름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 혹은 계랑으로 썼다. 시와 가야금에 능하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으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라는 명시를 남겼다. 뒷사람들이 『매창집(梅窓集)』을 묶었다. 전라북도 변산 반도의 개암사(開巖寺)에 그 목판이 전한다.
유희경과 이매창이 생전 서로를 그리워하며 주고받은 대표적인 시를 새겨 넣었다.
낭가재낭주(娘家在浪州)[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아가주경구(我家住京口)[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장단오동우(腸斷梧桐雨)[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유희경, 이매창의 시비... 만남의 상징처럼 서로 그리워한 마음을 조각으로 잘 표현하였다.
▼ 유희경, 이매창의 시비... 눈이 쌓여 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 북한산 국립공원 간판이 새로 세워져 있다.
■4 우암 송시열(1607~1689) 도봉동문(道峯洞門) 각자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요,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았다.
송시열은 일찍이 조선 성리학 도통의 시작인 조광조를 사모하여 그가 제향된 도봉 서원을 즐겨 찾아 글씨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현재 도봉 서원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이 많았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등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사후(死後)의 문집으로는 『우암집』,『송자대전』등이 출간되었다.
▼ 도봉동문(道峰洞門) 각자 바위와 북한산국립공원 표지석
■5 신정 왕후 별장 터(神貞 王后 別莊 터)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401번지에 있는 광륜사(光輪寺)라는 절은 원래 신정 왕후[1808~1890], 곧 조대비(趙大妃)의 별장 터이다. 신정 왕후는 순조(純祖)의 며느리이자 효명 세자의 부인으로 헌종(憲宗)을 낳았다. 1857년(철종 8) 순조(純祖)의 비인 순원 왕후(純元王后)가 죽자, 신정 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고,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자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정 왕후는 고종 즉위 후 1866년(고종 3)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6년(헌종 12) 아버지인 영돈령부사 조만영이 죽은 뒤, 신정 왕후는 현재의 도봉동인 도봉산 입구에 별장을 지었다. 도봉산은 산수가 수려하여 별장 터로 적격이었을 것이다.
고종 대에는 신정 왕후의 별장에서 흥선 대원군이 휴식을 취하며 국정을 보기도 하였다. 또한 6·25 전쟁 중에 미군의 숙소로 이용되었고, 1980년 훼손되기 전까지 영화 촬영장으로 많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신정 왕후 별장은 이후 매각된 뒤 헐리었고 별장 터에 금득사라는 개인 사찰이 설립되었다. 2001년에 성륜 문화 재단에서 금득사를 인수하여 중창 불사를 하였고, 2002년에 광륜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현재 광륜사의 대웅전 등 전각 대부분은 금득사 때 그대로라고 한다.
신정 왕후 별장 터에 들어선 광륜사의 삼성각에는 신정 왕후의 초상과 영가(靈駕)를 두어 신정 왕후와 광륜사의 인연을 보여 주고 있다.
▼ 도봉산 광륜사는 신정왕후의 별장지에 세워진 절이다.
▼ 도봉산 광륜사 삼성각에는 신정왕후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 신정왕후 초상
▼ 도봉산 광륜사 관음상은 특이하게 아이를 안고 있다.
▼ 도봉서원터 앞에는 가람 이병주 선생의 북한산찬가가 세겨져 있다.
■6 도봉서원과 각석군(서울시 기념물 제28호)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선 중종 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출발해 1696년(숙종 22)부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던 서원으로 도봉산 입구 등산길로 오르면 우측 옛 영국사 터에 위치해 있다. 1775년(영조51) 어필사액을 다시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400여 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지역에 있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도봉서원이 1871년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단을 설치하여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 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으나 1970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1971년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10일(춘향제)과 9월10일(추향제)에 전국 유림 및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 도봉서원터는 지금 공사 중이다. 몇 년 전부터 서원 공사를 하는데 지금은 아예 손을 놓고 있다.
▼ 도봉서원터 앞에 있는 계곡은 많은 각자들이 새겨져 있다...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서원터.
■7 김수영(1921~1968) 시비
종로 관철동 58-1에서 태어났으며 효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동경상대전문부에 입학 1943년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1952년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김수영 시인은 1954년 가족과 재회한 후 창동으로 이사하여 1956년 마포 구수동으로 분가한 이후에도 어머니와 도봉동 본가에서 양계를 하는 등 수시로 도봉동 본가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그가 태어난 관철동 집, 어린시절 살았던 종로6가집, 구수동집 등은 재개발로 남아있는 곳이 한 곳도 없으며, 도봉동 본가만이 시인의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김수영은 치열한 저항정신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이며,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활약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다. 그의 시와 문학적인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으며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시『풀』은 1968년 6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그의 마지막 작품(1968.5.29.)이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대표시로 『달나라의 장난』(1959년 간행), 『거대한 뿌리』(1974년 간행) 등 시집과 평론집 『시여 침을 뱉아라』(1975년 간행), 기타 번역서 등이 있다. 1981년 6월『김수영 시선』출간(지식산업사), 9월 『김수영 전집 1-시』, 『김수영 전집 2-산문』출간(민음사).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월 27일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하였다. 2001년 9월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이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도봉산 도봉서원 아래쪽인 도봉동 산 107번지에 김수영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시비 앞면에는 대표시 『풀』이 새겨져 있다(아래 사진). 2013년 11월 27일 구(舊) 방학3동 문화센터 자리(해등로82길 30)에 김수영문학관이 개관하였다.
▼ 김수영 시비... 새겨진 '풀' 시는 돌아가시기 몇 일 전에 쓴 작품이다.
■8 진주유씨(晉州柳氏) 문중 묘
▶ 유양(柳壤)
조선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유순정(柳順汀)의 아버지로,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냄. 영의정 유순정(중종반정 공신)의 부친
▶ 유첨정(柳添汀)
유양의 장남으로 영의정 유순정의 형이고, 좌의정 유부의 부친이다.
▶ 유부(柳溥)
?∼1544(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초명은 장(蔣). 자는 언박(彦博). 자해(子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壤)이고, 아버지는 첨정(添汀)이며, 어머니는 홍종(洪琮)의 딸이다. 영의정 순정(順汀)의 조카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군 7) 식년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04년 홍문관박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강원도도사를 지냈고, 1514년(중종 9) 경학(經學)에 밝다고 하여 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이어서 장령(掌令)·사간·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관기 확립과 풍속 교정에 이바지했으며, 특히 기재(忌齋)·장리(長利)의 폐단을 적극 논하였다.
그 뒤 1519년 경상도추고경차관(慶尙道推考敬差官)으로 파견되었으나 직무에 불성실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곧 홍문관응교에 복직되었다.
경연의 시강관을 겸임하면서 기강 확립을 위해서는 형벌보다는 명분을 바로 할 것과 현량과(賢良科)의 폐지를 주청하였다.
1521년 명나라 세종(世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어서 집의·대사간,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27년에 도승지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서 민정을 다스릴 때 생원·진사 등을 권농관으로 동원시켰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1529년 첨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명에서 ≪대명회전 大明會典≫을 다시 편찬한다는 말을 듣고 오기(誤記)로 말썽이 있던 종계문제(宗系問題)의 개정을 예부에 요구하였다.
귀국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자, 시무책을 올려 진휼(賑恤)이 급선무임을 강조했고, 시비를 밝혀 공론을 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사임했다가, 지중추부사를 거쳐 1533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는데, 대간에 의해 직무에 부적합하다는 탄핵을 계속 받았다. 그러나 성균관동지사·우찬성·좌찬성을 거쳐 1537년 10월 우의정에 올랐다.
때마침 김안로(金安老)와 그 일당이 축출될 때 연루되어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판중추부사로서 물러났다. 1539년 70세로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판의금부사·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 진주유씨 유양선생의 묘... 윗쪽에는 손자 유부의 묘가 있다.
▼ 무수골로 접어 들면 도봉산 우이암이 선명하게 보이고... 장막을 치듯 내려오며 무수골을 이룬다.
▼ 무수골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
■9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6호)
조선 15세기의 종친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1465∼1507)의 묘역과 신도비이다. 그는 세종의 아홉 번째 지자(支字)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아들이다. 세조 11년(1465) 출생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며, 어머니는 좌찬성에 추증된 신윤동(申允童)의 따님이다. 어려서 외할머니 이씨의 손에 자랐으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열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의 군(君)에 봉해졌고, 그 뒤 사옹원 제조를 지냈으며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연산군 12년(1506) 큰아들 완천부정(完川副正) 이기(李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했는데, 그는 남해(南海)에 정배되었다. 수개월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복직되었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다. 중종 2년(1507) 4월 27일 사망하였으며, 그해 8월 임신 일에 도봉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는데, 11살 때 어머니 신씨를 잃었고 3년이 채 못되어 다시 부친상을 당하였다. 또 매사에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특히 상례(喪禮)를 잘하여 종친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뜰에 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부인 유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유양(柳壤)의 따님으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비는 1509년 9월 건립된 것으로 상하 2단의 받침돌 위에 대좌(臺座)를 얹고 그 위에 백일석으로 만든 비신(碑身)과 이수( 首)를 얹은 형태이다. 대좌에는 연꽃잎 무늬와 안상(眼象)을 새겼고, 이수에는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을 비(非) 대칭적으로 새긴 점이 특이하다. 16세기 초를 대표하는 석비로서 임당정공신도비(林塘鄭公神道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호) 등 17세기 석비의 선례가 된다. 비문은 큰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袞, 1471∼1527)이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다. "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도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곳은 그의 부(父)인 영해군의 묘와 그의 동생인 길안군 및 아들인 완천군과 강녕군의 묘가 같이 있으며 현재 이 마을에는 영해군의 후손들이 이 고장을 지키고 있다.
▶ 충노 금동 묘
영해군 이당을 비롯한 후손들 묘역 하단에 묻혀 있는 충노 금동 묘는 조선시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노비의 묘역으로 비문까지 있다. 일화에 의하면 금동은 세종의 증손자인 강녕군 ‘기’의 종으로 정원이 잘 가꿔진 아담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연산이 사랑하는 기녀가 ‘기’의 집을 빼앗고자 “노비 금동이를 시켜 ‘기’가 첩을 욕하도록 했다.” 라고 일러바치자 연산은 노하여 ‘기’와 ‘금동’을 가두고 낙형으로 심문하자 “죄는 종에게 있을 뿐 주인께선 전혀 모르시는 바입니다.” 라고 함으로써 기는 화를 면하고 금동은 마침내 형벌을 받았으며, 강녕군 부자와 여러 형제는 남해섬으로 귀양살이를 갔다가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고 전한다.
▼ 세종대왕의 서19자인 영해군 묘 들어가는 곳...
▼ 충노 금동의 묘... 맨 위에 있는 묘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 묘이다.
▼ 영해군 묘 전경
▼ 영해군 묘 후경... 앞쪽 안산이 삼봉인데 가운데가 죽어있어 좋지 못하다.
▼ 영해군의 아들인 영춘군 이인의 묘역 가는 길...
▼ 영춘군 이인 묘역 전경
▼ 영춘군 이인 신도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6호)
▼ 영춘군 이인 묘에서 바라다본 수락산...
▼ 무수골에서 우이암쪽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소나무숲길...
■13 무수골
무수골이란 마을 이름은 1477년(성종8년)세종의 9번째 아들 영해군의 묘가 조성되면서 유래되었다. 옛 명칭은 수철동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무수동으로 바뀌었으며 무수(無愁)골은 ‘무수울’이라고도 한다.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는 골짜기,마을이란 뜻으로 세종이 먼저 간 아들의 묘를 찾아 왔다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도봉동 104번지 일대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약 500여년 전에는 수철동(水鐵) 일명 무 쇠골이라 하였고, 이후 무수동(無愁洞)이라 개칭하였는데 그 연유는 영해군 묘소 형국이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으로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수동(無愁洞)이라 호칭을 했다. 또한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생겼다는 설과 세종이 재위시 이 곳에 왔다가 원터(도봉동 578번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 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무수골로 칭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무수골 입구에 세워진 무수골의 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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