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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부천]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변영만,변영태 3형제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5. 6. 28. 09:00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

     

    변영로 시인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논개라는 시를 통해 알았다. 그 뒤로 변영태 장관에 대해서도 조금은 들은 기억이 있다. 현장에 가서보니 제일 맏형이 변영만인데 이분도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다.

    변영로 시인 한 분을 찾아뵈려고 찾아간 곳이지만 이렇듯 선조들도 만나고 형제도 만나고 하니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집안에 후손을 잘 두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 말인가 보다.

    부천시에서 수주 변영로는 대단한 유명인이다. 그의 호를 따서 묘역 인근의 도로가 수주로이며, 수주초,중,고등학교도 보이고 동상도 있다. 묘역에는 그의 시비가 두개씩이나 있다.

    변영만(卞榮晩)·변영로(卞榮魯)와 함께 이들 3형제는 옛 중국의 당송팔대가이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3부자에 비겨 한국의 3소(三蘇)라고까지 불리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대단한 형제들이다. 묘역에 가니 나란히 3형제 한묘역에 누워계신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시인·영문학자.
    서울 출신. 아호는 수주(樹州). 정상(鼎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평창 이씨(平昌李氏)흥순(興順)과 결혼하였다. 1915년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 新民公論≫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신가정 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청춘 靑春≫에 영시 <코스모스 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 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 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 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 : 작품을 적게 제작함.)의 시인이었다.
    ≪신생활≫·≪동명≫·≪개벽 開闢≫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실제 失題>·<사벽송 四壁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璧)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 酩酊四十年≫(1953)·≪수주시문선 樹州詩文選≫(1959)·영문시집 ≪진달래동산 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문선집 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

    소재지

    경기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산 63-7

    관리자(연락처)

    밀양변씨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 묘역 입구..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기념비 갈림길..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 앞의 기념비..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기념비 전면.. 

     ▼ 기념비 후면... 이희승박사 찬하고 일중 김충현이 씀..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 전경..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묘 후경.. 앞쪽에 있는 것이 기념비... 

     

    변영만(卞榮晩) 

     

    1889(고종 26)∼1954. 법률가·학자.
    자는 곡명(穀明), 호는 산강재(山康齋)·곡명(曲明)·백민거사(白旻居士). 경기도 강화(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출신. 군수 정상(鼎相)의 아들이다.
    1905년 관립법관양성소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들어갔다. 1908년 졸업과 동시에 법관이 되어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하였다가 사법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법관직을 사직, 신의주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중국에 망명하였다가 1918년 귀국하여 학문에 전심, 전공을 바꾸어 한학·영문학을 연구하였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의 교수로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국학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20세기지삼대괴물론(二十世紀之三大怪物論)』이 있다.

     

    변영태(卞榮泰) 

     

    1892(고종 29)∼1969. 정치가·영문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일석(逸石). 아버지 정상(鼎相)과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재동소학교(齋洞小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2살에 채씨(蔡氏)부인과 혼인하였다.
    재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교동고등소학교(校洞高等小學校)를 거쳐 계산보통학교(桂山普通學校)로 전학, 15살에 고등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애국지사이며 목사인 전덕기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나가면서 이회영(李會榮)의 지도를 받았다.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가자 19살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6년 북경 부근에 있는 협화대학(協和大學) 1년을 수료하였으며, 신흥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24년 동안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의원 접흡단비서처(民主議院接洽團祕書處)에서 영어비서로 근무한 일이 있으며, 다시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9년에는 대통령특사로 정부승인을 교섭하기 위하여 필리핀에 다녀왔다. 1951년에는 국제연합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회의에 참석하였고,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제3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국제연합수석대표, 1953년에 국무총리가 되어 외무부장관직을 겸임하였다.
    1954년에는 제네바정치협상회의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14개 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56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진양성에 힘을 썼고,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그는 철저한 규칙생활로 건강관리를 하였고 공사생활이 청빈하였다. 변영만(卞榮晩)·변영로(卞榮魯)와 함께 이들 3형제는 일세의 기재(奇才)로서 옛 중국의 당송팔대가이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3부자에 비겨 한국의 3소(三蘇)라고까지 불리었다.
    저서로는 ≪외교여록 外交餘錄≫·≪논어영역 論語英譯≫ 이외에 ≪My Attitude toward Ancestor Worship≫(1925)·≪Tales from Korea≫(1946)·≪Song from Korea≫(1948)·≪Korea My Country≫(1949)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3형제 묘소(좌로부터)...<인터넷에서 옮겨옴> 

     둘째 변영태 묘... 현장에서는 3형제에 대한 자료를 잘 몰라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일부 인터넷에서 가져옴... 

      일석 변영태 묘비...

      일석 변영태 묘비 후면...

      일석 변영태 묘 후경... 우측에 있는 비석이 변영만 묘비...

     ▼ 변영만 묘...<두산백과사전에서 옮겨옴> 현장에서 사진을 찍지 못함.

     변영만 묘 후경...

     ▼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3형제 묘소 후경(우로부터)...<두산백과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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