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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좌의정 남지(南智) 묘(영의정 남재(南在) 손자)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8. 3. 13. 10:00
좌의정 남지(南智) 묘(영의정 남재(南在) 손자)
진천답사에서 좌의정 남지선생 묘를 답사하였다. 남지(南智) 선생은 영의정 남재(南在)의 손자로 의령남씨의 계보를 잇게 해주는 큰 인물 중 한분이다. 남지묘역은 둥근 무곡 현무정에서 힘있게 내려와 좋은 맥을 갖추고 있으며, 국세도 포근하게 잘 갖춰져 있다. 향법은 정음정양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산 아래에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산 뒤쪽의 과협지에서 들어가기 때문에 먼저 부인 묘와 만나는데 부인 묘는 혈을 맺지 못하는 과룡처로 남지선생의 묘로 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부인 묘에서 한번 더 우선맥으로 돌아 남지 묘로 입수하는데 거의 평지맥으로 입수하여 마지막 입수일절이 변화가 미약하다.
묘역은 잘 갖춰져 있고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향을 정했는데 앞쪽의 안산이 쌍봉이어서 그 사이에 향을 맞췄다. 물은 우선수(右旋水) 진파(辰破)로 향법으로는 맞지 않는다.
아늑한 곳에 양명한 기운을 받고 있고, 묘 봉분은 사다리꼴로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져 있다. 나오면서 보니 안산이 나즈막한 금성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배를 내밀고 있어서 여인들이 큰 소리를 치는 집안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막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묘역 앞을 숲으로 조성하여 묘역에서는 안산이 보이지 않는다.
남지(南智)
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 충경공 남재(南在)이며, 아버지는 병조의랑을 지낸 남문경(南文景)이다. 아들로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남윤(南倫), 손자로 남흔(南忻)과 남칭(南稱)을 두었다.
남지(南智)[1400~1452]는 17세인 1425년(세종 7) 음보로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그 후 경상도관찰부 경력에 임명되었다. 이때 하연(河演)이 관찰사로 남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나이가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 할꼬”라며 걱정하였다. 남지가 들어와 인사를 하자 하연은 시험을 하기 위해 판단하기 어려운 공사(公事) 문서를 주면서 처결하라 하였다. 남지는 이튿날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주면서 “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이요,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해 하연을 놀라게 하였다. 그 뒤부터 하연이 남지를 간곡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중앙으로 돌아와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이때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친족을 간음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무도 이를 발설하는 자가 없었는데 담력과 뜻이 있는 남지가 피의자를 미리 잡아다 놓고 조서로가 조회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초하여 사실을 실토하게 하였다. 세종이 간음범을 중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조서로는 서인이 되었다.
1435년(세종 17) 형조참판으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대사헌·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449년(세종 31) 우의정에 올랐으며, 1451년(문종 1) 좌의정이 되었다. 이때 세종에게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더불어 병약한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풍병(風病)으로 몸이 마비되어 정사를 볼 수 없게 되면서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딸이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였는데,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 부자가 화를 당하였을 때 풍질(風疾) 때문에 위기를 피했다. 의성군(宜成君)에 봉해졌고, 손자인 남흔(南忻)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8세손인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찬(撰)한 신도비가 있다.
묘소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양천산에 있는데 진천읍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청주 방향으로 가다 문백면에서 양천산(凉泉山) 쪽으로 좌회전하거나, 군도 3호선을 따라 청주 방향이나 증평나들목 쪽으로 직진하다가 평산리에서 우회전하여 양천산 쪽으로 가면 산자락 끝에 있다.
충간공 남지의 묘소는 조선 전기에 조성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동창이 밝았느냐’로 이름난 조선 후기 문신인 8세손 남구만(南九萬)이 지었으며, 신도비는 1713년(숙종 39)에 세워졌다. 묘소의 비석은 1732년(영조 8)에 다시 세웠다.
묘소는 사다리꼴의 대형 분묘로, 봉분의 크기는 760×665×300㎝이며 남동향이다. 봉분의 아래쪽에 돌로 테를 두른 점이 특이하다. 묘소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1기가 있고, 오른쪽으로 비석, 장명등 1기, 문인석 한 쌍이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높이 214㎝, 폭 82㎝, 두께 42㎝이며, 묘소 아래 150m 지점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좌의정충간공남지묘(左議政忠簡公南智墓)’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는 1988년 9월 30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의령남씨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를 맡고 있다.
<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
문화재명칭
좌의정 남지(南智) 묘 및 신도비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 18-1
관리자(연락처)
진천군청, 의령남씨종중
▼좌의정 남지(南智) 묘
▼좌의정 남지(南智) 묘는 과협처에서 거꾸로 들어간다.
▼좌의정 남지(南智) 부인 묘... 비룡혈처럼 보이지만 변화가 없이 밋밋하게 올라가서 과룡지에 불과하다.
▼좌의정 남지(南智) 부인 묘에서 바라본 현무정...
▼좌의정 남지(南智) 묘에서 바라본 무곡 현무정... 힘있게 맥이 내려온다.(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묘역 답사 전에는 반드시 예를 갖춘다.
▼좌의정 남지(南智) 묘 전경
▼좌의정 남지(南智) 묘비...
▼좌의정 남지(南智) 묘 석물과 청룡
▼좌의정 남지(南智) 묘 백호방 석물...
▼좌의정 남지(南智) 묘비는 특이한 방향에 있고... 뒷면에 부인 묘 위치를 표기하였다.
▼좌의정 남지(南智) 묘 측후경
▼좌의정 남지(南智) 묘 후경과 향선... 물은 우선수로 안산 끝 진파(辰破)로 빠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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