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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횡성]대관령 길 개척한 고형산(高荊山)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9. 3. 4. 09:00


    대관령 길 개척한 고형산(高荊山)


    풍수사이트를 돌아다니는 한국의 100대명당이라는 문서가 있다. 어느 분이 오래전에 작성한 것인데 많은 부분이 공감되는 묘지들로 채워져 있어서 나도 자주 확인해 보곤 하는데 강원도에 있는 묘 중에 횡성에 고형산 묘가 100대 명당에 들어있어서 어딘지 궁금해서 이번 원주답사에 포함시키려고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사진만 올라있는 곳이 몇 군데 있고 주소를 올려놓은 곳을 봤더니 워낙 넓은 범위로 되어 있어서 묘지 찾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 먼저 다녀오신 분의 도움으로 간신히 찾아 나섰다.

    이곳에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얘기이지만 먼저 다녀오신 분들은 제발 큰 문제가 아니라면 주소를 함께 올려주는 미덕을 갖추길 기대한다. 예전에는 문화제 도난 등으로 일부러 안 알려주곤 했는데 지금은 온 국토가 방범 cctv로 싸여 있어서 도난 위험은 거의 없는 상태다. 범죄자들도 하루를 못 넘기고 거의 잡히는 때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곳 고형산 묘 장명등이 2007년도 도난당한 곳으로 기록에 나온다. 지금쯤 잡혔는지 궁금해 진다. 아무튼 문제가 안되는 범위에서 주소를 함께 올려주고 찾기 쉽도록 해주면 뒤에 찾는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고형산의 시호는 위열(威烈), 익장(翼莊), 익평(翼平), 함렬(咸烈) 등으로 나오는데 한 사람의 시호가 이렇게 많은게 맞는건지, 아니면 잘 못 알려진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일단 기록에 있는 위열공으로 표기를 한다.

    고형산 묘는 100대 명당에 들만한 묘역이 아닌데 왜 그곳에 등재되었을까? 그 위쪽에 고형산 할머니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가 빙고형 돌혈로 앞쪽 보개삼태사 조산을 바라보면서 큰 힘을 얻고 있는 묘라서 그럴거란 생각을 해본다.

    이곳이 이토록 인터넷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의외라고 생각되어 지도를 포함해서 찾아가는 방법을 자세히 올리니 뒤에 찾는 분들은 편하게 이용하시길 바란다.



    대관령 길 개척한 고형산(高荊山)


    조선 시대의 문신(1453~ 1528). 자는 정숙(靜叔). 형조, 호조, 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냈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의 청년 학자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고사신의 아들로 태어나 성종14년(1483년)에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해 종사관 해주목사 함경북도 절도사 함경도관찰사 등의 요직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와 우찬성의 벼슬까지 행정력을 바탕으로 맡은바 소임을 다해 백성들에게 추앙 받은 인물이다. 

    성품이 정직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했던 선생은 오랫동안 병사와 금전과 양곡을 관리하는 직임을 맡아오면서 중종 11년에는 곡식을 저축해 두고 흉작에 대비하는 사창법(社倉法)을 실시해 백성을 구휼할 것을 주장하는 등 백성의 입장에 서서 모든 행정력을 발휘했다. 

    같은해 11월 자신이 병들고 모친마저도 노환으로 시달리자 고향 횡성으로 갈 것을 결심, 사직하려 했으나 중종은 선생을 강원도관찰사로 발령을 내면서 고향에서 모친을 봉양하면서 목민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강릉진 삼척진 동포 울진포 대포 등 다섯 진포의 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을 중앙에 올리기도 했다. 

    또 선생이 이 시기에 주목받은 것은 대관령 길을 개통한 일. 앞서 해주목사 함경북도 절도사 및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누구보다 북방의 일에 능통한 선생은 서울에서 강릉까지의 도로를 개설해 백성들의 편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선생의 사망 후 병자호란으로 주문진에 상륙한 적군이 선생이 개설한 도로를 따라오는 바람에 한양이 함락당했다는 이유로 인조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반면 후일 경강로(京江路)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선생의 무고함이 입증되고 재평가 돼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와 함께 횡성군 정암리 망백마을 주변의 사방 십리 땅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선생은 당시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치는 조광조 일파의 정치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의 한사람으로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반대하며, 급기야 1519년 남곤 일파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세력을 축출하는데 공헌했다. 

    이처럼 선생은 단종 1년(1453년)에 태어나 중종 23년(1528년)까지 평생동안을 백성의 입장에서 불만을 듣고 직접 상소하는 등 백성들의 존경과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아직 선생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뤄지지 못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선생의 본관이 어디인지, 출생지는 과연 횡성이 맞는지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횡성고씨 종중과 학계에서는 문과방목, 삼화방목 등의 문헌의 기록에 따라 선생의 본관을 횡성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비해 제주고씨 종중에서는 고려말기의 무신인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세손으로 족보에 기록돼 있다는 것. 

    더욱이 화전은 옛 횡성의 이름으로 제주고씨의 시조 탐라왕에서 갈라진 화전군파의 후손으로 종중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시제를 올리고 있고, 매년 묘소를 맡아 관리하면서 선생의 넋을 기리며 추모하고있다. 

    <강원도민일보 2002. 9. 30. 10월의 문화인물중에서 인용한 것을 인터넷에서 재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소재지

    강원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산 207-1(네비:정암리 559)

    관리자(연락처)

    횡성고씨

     

    ▼ 대관령 길 개척한 고형산(高荊山) 묘 위치... 조충 묘의 앞쪽 주차장쪽이 결인처이며, 정경부인 경주이씨(고형산 조모) 묘는 산정상 부위에 돌혈로 점혈하였고 그 아래 고사신(고형산 부) 묘, 그리고 맨 앞쪽에 고형산 묘가 있다.

    ▼ 대관령 길 개척한 고형산(高荊山) 묘가 있는 덕고마을 입구... 안내표지판이 거의 안보인다.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전경... 백호쪽 문인석이 넘어질 듯 기울어져 있다.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근경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비... 자세히 보면 글자가 보인다.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문인석...


    ▼ 횡성군에서 고형산을 기리며 세워놓은 안내판이 시간이 지나면서 흉하게 망가져 있다. 그냥 올리기 뭐해서 대충 보기 흉한걸 없애고 올린다.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상하장으로 모셨는데 일반적으로 왕가에서는 앞쪽이 부인, 뒤쪽이 부군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민묘에서는 앞쪽에 부군이 모셔진 경우가 더 많다.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조안산인 보개삼태사...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에서 바라본 보개삼태사...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후경... 좌향은 기실 보개삼태사에 맞추지 않았다.

    ▼ 위열공(威烈公) 고형산(高荊山) 묘 후경


    ▼ 고형산(高荊山)의 아버지 고사신(高思信) 묘

    ▼ 고사신(高思信) 묘 전경

    ▼ 고사신(高思信) 묘비

    ▼ 고사신(高思信) 묘 문인석


    ▼ 고사신(高思信) 묘는 곡장을 두른듯 돌로 사성을 쌓았다. 아마도 제주도의 풍습을 따른 듯 보인다.


    ▼ 고형산(高荊山) 할머니이자 고사신(高思信) 어머니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 망주석이 특이하다.

    ▼ 고형산(高荊山) 조모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

    ▼ 고형산(高荊山) 조모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비

    ▼ 고형산(高荊山) 조모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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