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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천장산(天藏山) 의릉(懿陵)답사는 즐거워/조선왕릉답사 2019. 4. 15. 09:00
의릉(懿陵)
의릉은 집 가까이 있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다. 왕릉답사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수시로 가는 곳이다. 그런데 글은 많이 못 올린것 같다. 아무튼 이곳도 정릉처럼 비운의 왕릉으로 분류 될 수 있을 정도로 썩 내키지 않는 왕릉이다. 재위 4년 남짓에 신임사화 2년과 당쟁이 극에 달한 때이니 좋은 면 보다는 안 좋은 면이 더 많이 기록된 왕이다. 이는 다음 왕이 영조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노론의 입장에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리라.
의릉은 한가지 숨은 사실이 있다. 내가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의릉은 릉의 좌향을 전혀 엉뚱하게 놓아서 후세 발복을 근원적으로 차단한 릉이다. 조선왕릉 릉제가 특이한 동원상하릉으로 되어 왕릉공부하러 많이 오는 곳이다. 석물은 숙종의 명릉을 따라 작고 아담하게 설치되어 있다. 입수맥은 힘없게 내려오는데 중간중간 석맥이 박혀있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우뚝 솟은 유혈인데 의릉은 거의 평지룡으로 된 왕릉이다.
왕릉을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곳 왕릉을 어느 왕이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후대 왕이 아들인 경우에는 왕릉이 권위가 있고 힘이 있는 반면에 후대왕이 영조처럼 어려운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넘긴 왕이 선대왕의 묘를 잘 써주었을리는 만무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의 왕릉을 설치할 때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왕릉에 가면 파노라마처럼 그 시기의 역사가 스쳐지나간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사라고 하는가 보다.
천장산(天藏山) 의릉(懿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조선 제20대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 사적 204호. 앞뒤로 비껴 능역을 조성하였고, 각각 단릉의 상설을 갖추고, 왕릉에만 굽은 담장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낸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다.
경종은 숙종의 제1자로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이다. 숙종의 승하 후 경희궁에서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였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5세 때 세자빈이 되었다가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는데, 26세로 소생없이 승하하였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나 이 능은 앞뒤로 비껴 능역을 조성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단릉(單陵)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曲墻 : 굽은 담장)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낸 배치이다.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으로서 풍수지리적으로 생기왕성한 정혈(正穴)에 봉릉(奉陵)한 것이다.
석물은 병풍석이 없는 난간석(欄干石)ㆍ혼유석(魂遊石)ㆍ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ㆍ문무석(文武石)과 말ㆍ양ㆍ호랑이가 있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 :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의릉의 능역은 11만 4,658평이다.
경종(景宗)
조선후기 제20대 왕, 재위 1720∼172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윤(李昀), 자는 휘서(輝瑞).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이다. 비(妃)는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이고, 계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1689년(숙종 15) 원자(元子)로 정호되자 노론인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상조론(尙早論)을 주장하다가 사사되고 민비(閔妃)가 폐출되었다.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고 생모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생모 장씨는 1694년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어 1701년 사사되었다. 세자는 이 때부터 질환이 있었으며, 1717년 숙종은 세자의 다병무자(多病無子)를 걱정해 몰래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이복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그 해 세자 대리청정(世子代理聽政)을 명했는데, 소론 측은 세자의 흠을 잡아 바꾸려 한다 하여 반대하였다. 이후로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즉위한 이듬 해인 1721년(경종 1) 경종의 다병무자를 이유로 건저(建儲: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일)의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게 하였다.
이어 집의 조성복(趙聖復)의 소(疏)에 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했으나, 왕의 보호를 명분으로 한 소론 측이 크게 반발해 철회하였다.
더욱이, 질환이 점점 심해져 정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국사의 현명한 재단(裁斷)도 기대할 수 없어 그 권위도 추락하였다. 때문에 이를 기회로 권신(權臣)의 전횡과 당인(黨人)들의 음모가 더욱 심해졌다.
그 해 12월 김일경(金一鏡) 등은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한 조성복과 이를 봉행하고자 한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다고 모함해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하는 환국을 단행하였다.
이어 1722년 3월 노론 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소론 일파의 의도대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관련자 50여 인을 처단하고, 그 밖에 170여 인이 유배 또는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로 노론을 일망타진한 소론은 경종의 재위 기간에 정권을 전횡하였다.
소론이 집권하자 1722년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따라 1717년 관작을 추탈당한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과 그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관직 증시(官職贈諡)를 회복시켰다.
또 그 해의 흉작으로 각 도의 연분사목(年分事目)을 개정해 전세율을 낮추었으며, 삼남 지방의 양전(量田)에 민원(民怨)이 있다 하여 이를 시정하였다.
1723년 긴급한 일이 있어 왕이 중신을 부를 때 발급하는 명소통부(命召通符)를 개조했고, 서양의 수총기(水銃器: 消火器)를 모방해 이를 제작하게 하였다.
또, 관상감에 명을 내려 서양의 문진종(問辰鐘)을 제작하게 하고, 독도(獨島)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혀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을 간행하였다. 1724년에는 서원에 급여한 전결(田結)의 환수를 의논하였다.
세자 때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었으며, 재위 4년 동안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호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이고, 묘호는 경종이며, 능호는 의릉(懿陵)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사적 제204호
문화재명칭
의릉(懿陵)
소재지
서울 성북구 화랑로 32길 146-20
관리자(연락처)
문화재청
▼ 천장산(天藏山) 의릉(懿陵) 전경
▼ 천장산(天藏山) 의릉(懿陵) 안내판
▼ 의릉(懿陵) 상설도 해설...
▼ 의릉(懿陵) 해설사님과 학우님들...
▼ 의릉(懿陵) 전경... 뒤에 보이는 산이 하늘이 숨겨 놓은 곳이라는 천장산...
▼ 의릉(懿陵) 정자각
▼ 의릉(懿陵) 판위, 정자각과 비각
▼ 의릉(懿陵) 능침은 낮으막하게 위치해 있다.
▼ 의릉(懿陵) 능침 아래 산신석이 있다. 왕릉의 산신석은 능침 아래에 있다...
▼ 의릉(懿陵) 비각 안내판
▼ 의릉(懿陵) 비각
▼ 의릉(懿陵) 능비...
▼ 의릉(懿陵) 능비에는 총탄자국이 집중적으로 몰려있다. 이것은 전쟁의 상흔이라기 보다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다.
▼ 의릉(懿陵) 정자각으로 본 능침
▼ 의릉(懿陵) 기신제 과정을 설명한 사진과 진설도
▼ 의릉(懿陵) 능침
▼ 의릉(懿陵) 정자각 뒤로 신로가 이어져 있다.
▼ 의릉(懿陵) 예감
▼ 의릉(懿陵) 측경... 동원상하릉으로 조성된 조선왕릉이다. 효종의 녕릉과 함께 상하릉으로 조성되었다. 앞쪽이 왕비의 능, 뒤쪽이 왕의 릉이다.
▼ 의릉(懿陵)... 경종의 릉이다. 뒤로 곡장이 둘러졌다.
▼ 의릉(懿陵)
▼ 의릉(懿陵) 백호방...
▼ 의릉(懿陵) 청룡방...
▼ 의릉(懿陵) 백호방 석물... 석물이 작아서 사람의 키만 하다. 숙종 명릉을 따랐다.
▼ 의릉(懿陵) 청룡방 석물... 원래의 무인석은 새까맣게 변색되었는데 그나마 세척을 한듯 보인다.
▼ 의릉(懿陵) 장명등
▼ 의릉(懿陵) 망주석... 망주석 세호는 청룡은 올라가고...
▼ 망주석 세호 백호쪽은 내려온다. 이를두고 어느분이 남자 즉 왕의 힘을 강화하고, 여인네들의 힘을 빼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 의릉(懿陵)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둘레석만 설치했다. 석양과 석호 또한 4쌍씩 왕릉에 맞게 배치되었다.
▼ 의릉(懿陵) 석호
▼ 의릉(懿陵) 석양, 석호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곡장이 생략되었다.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석호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에서 바라본 경종의 릉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전경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망주석 세호는 청룡쪽은 내려오고 백호쪽은 올라간다.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청룡쪽 석물...
▼ 의릉(懿陵) 선의왕후 어씨의 능 백호쪽 석물...
▼ 의릉(懿陵) 위쪽으로 올라가면 멋드러진 향나무가 있다.
▼ 의릉(懿陵) 입수룡은 안쪽으로 철망이 쳐져 있다. 입수룡은 기복이 없이 약간의 굴곡만 있다.
▼ 의릉(懿陵)을 한동안 이용한 중앙정보부 건물...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 의릉(懿陵)에 쌩뚱맞게 들어선 중앙정보부 강당건물... 예전에는 개방을 하더니 지금은 굳게 잠겨있다.
▼ 의릉(懿陵)이 위치한 석관동(돌곶이) 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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