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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좌의정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9. 5. 20. 22:30
좌의정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순흥안씨 안당선생 묘는 퇴촌 가는 길에 위치하여 두어번 찾았는데 입구의 신도비까지는 쉽게 접근 했지만 묘역으로 오르는 길을 찾지못해 매번 되돌아오곤 했다. 여름철에는 숲이 우거져서 찾기에 조심스러워서 그냥 되돌아오곤 했다. 이번 광주 답사에서 길목에 있는 안당 선생 묘를 찾았는데 무작정 산을 타고 올랐는데 나중에 보니 묘역 백호방으로 길이 나있다.
묘역에는 안당 묘와 두 아들의 단이 조성되어있고 묘역 맨 밑에 신도비가 거미줄과 잡풀에 싸여 있다. 마을 안쪽에 새로 세운 신도비가 있다고 들었는데 미쳐 확인하지 못했다.
묘역을 오르는 길에는 개들이 많아서 나처럼 개를 겁내는 사람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날은 개를 피해 윗쪽 공장지대로 돌아서 개울을 건너서 간신히 들어갔다.
묘역은 얕으막한 능선 산진처에 있는데 좌우 용호 사이 명당에 예전에는 없었을 전답들이 들어서면서 바람길이 되어 조금은 허하게 느껴진다. 부인 묘는 앞쪽 산에 있다고 하여 위치까지 확인해 놓았으나 찾지는 못했다.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1461(세조 7)∼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언보(彦寶), 호는 영모당(永慕堂). 서울 출신. 해주목사 안종약(安從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 안경(安璟)이고, 아버지는 사예인 안돈후(安敦厚)이다. 어머니는 사예(司藝) 박융(朴融)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안처겸(安處謙)·안처함(安處諴)·안처근(安處謹)이 있다.
1480년(성종 11)에 생원이 되고, 이듬해 1481년(성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성(司成)을 거쳤다. 연산군 때는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군 2)에 장령(掌令),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폐지했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507년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 12월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작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형조·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년 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奔競: 세가 등에게 하는 이권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관리 등용에 있어 순자법(循資法: 근무 기간에 따라 차례로 승진시키는 제도)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서 쓸 것을 주장하였다.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김대유(金大有)·반석평(藩碩枰)·송흠(宋欽)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하였다.
같은 해 8월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求言) 해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하였다. 이 일로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 높이 추앙받게 되었다.
1516년에 직을 바꾸어줄 것을 청해 윤허받았으나 다시 다음 해에 호조판서로 기용되고, 1518년에 우찬성이 되었다가 그 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우의정 임명 과정에서 김전(金詮)과 경합했으나 사림 계열의 지지로 안당이 제수받게 되었다.
이 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啓請)했다. 1519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삭훈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하여 구원하고자 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다. 더욱 현량과(賢良科)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했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하였다. 이 해 12월에 파직당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告身)을 환수시킬 것을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1521년 아들 안처겸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叔), 권전(權磌) 등과 함께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누었다. 이 사건으로 안처겸은 송사련(宋祀連)에 의해 고변당하였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안당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되어 교사형(絞死刑)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심정 등이 집의(執義) 윤지형(尹止衡)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것으로 신사무옥이라 이른다.
1566년(명종 21) 손자인 안윤(安玧)의 상소에 의하여 누명이 벗겨지고 복관되었다.
행동이 신중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공정한 성품으로 옳은 일에 용감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사림을 정계에 등용시키고 옹호하여, 사림에게 중망이 컸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묘
소재지
경기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산 22
관리자(연락처)
순흥안씨
▼ 좌의정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묘
▼ 좌의정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묘 주산...
▼ 좌의정 영모당(永慕堂) 안당(安瑭) 묘 청룡방...
▼ 좌의정 안당(安瑭) 묘 전경
▼ 좌의정 안당(安瑭) 묘
▼ 좌의정 안당(安瑭) 묘비
▼ 좌의정 안당(安瑭) 묘비 후면에 새겨진 배위 정경부인 전의이씨(貞敬夫人 全義李氏) 묘 위치
▼ 좌의정 안당(安瑭) 구 묘비
▼ 좌의정 안당(安瑭) 묘 망주석과 청룡방
▼ 좌의정 안당(安瑭) 묘 백호방
▼ 좌의정 안당(安瑭) 묘 측경
▼ 좌의정 안당(安瑭) 묘 입수도두
▼ 좌의정 안당(安瑭) 묘 후경... 전순이 좌로 돌아서 혈을 맺기에는 부족하다.
▼ 좌의정 안당(安瑭) 묘 조안산
▼ 좌의정 안당(安瑭)과 함께 희생된 두 아들 안처겸, 안처근 세사단...
▼ 좌의정 안당(安瑭) 묘 아래쪽 밭에는 구 신도비가 있다.
▼ 좌의정 안당(安瑭) 신도비... 중간부분은 판독이 안된다.
▼ 좌의정 안당(安瑭) 신도비... 관리가 안되어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 좌의정 안당(安瑭) 신도비 전자(篆字)
▼ 좌의정 안당(安瑭) 신 신도비... 묘역 아래쪽에 있는데 미쳐 확인을 못했다.(네이버블로그 현풍곽씨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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