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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횡성]담약(湛若) 조충(趙冲) 장군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9. 5. 21. 09:00


    담약(湛若) 조충(趙冲) 장군


    조충장군 묘는 강원도 횡성에서 고형산 묘를 찾다가 우연히 찾은 묘이다. 고형산 묘와 같은 번지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위성사진에 아주 잘 정비된 묘역이 있어 이것이 고형산 선생 묘인줄 알고 찾았는데 조충 장군 묘였다. 이렇듯 묘지답사는 여러번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 겨우겨우 찾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고려시대 거란족을 무찌르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분이다. 잘 알지 못해서 자세한 것은 못올리지만 묘역이 실전된지 약700여년 만에 찾았는데 개성에 있었는데 남북분단이 될 것을 우려해 종친회에서 본향이 있는 이곳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 

    이곳은 덕고산 아래 고형산 묘로 들어가는 과협지 직전의 태(胎)에 해당하는 과룡처로 기운을 맺지 못하고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묘역을 오르면 금방 느끼겠지만 작은 산정 부근인데 수기가 엄청나서 이끼가 한 가득이다. 멀리에서 이곳 본향으로 모신 분인데 조금은 안쓰럽다.


    담약(湛若) 조충(趙冲)


    고려후기 정당문학,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 현재의 강원도 횡성군)이며, 자는 담약(湛若)이다. 태보(太保)인 조정신(趙正臣)의 증손이고, 각문지후(閣門祗侯) 조시언(趙時彦)의 손자이며, 시중(侍中) 조영인(趙永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직사관(直史館) 윤자고(尹子固)의 딸이다.

    음서(蔭敍)로 벼슬에 올라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190년(명종 20)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1209년(희종 5)에 국자좨주(國子祭酒), 1211년에는 대사성 한림학사(大司成 翰林學士)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였다. 이후 동북면병마사·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216년(고종 3)에는 문·무를 겸비했다고 하여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樞密副使翰林學士承旨)로서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는 등 최충헌정권에 순응하며 관직에 나아갔다.

    그 해에 몽고군에게 압박당한 거란유종(契丹遺種: 僞遼國人)이 고려 북방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이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었는데, 그 휘하의 부원수로 임명되어 경도(京都) 사람 가운데 종군 가능자와 승군(僧軍)을 모아 출정하였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방보(鄭邦輔)로 원수가 교체된 뒤 염주(鹽州)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안주 태조탄(太祖灘)까지 추격했다가 패배하여 파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진족의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 인주(麟州)·용주(龍州)·정주(靜州) 등지의 경계 내에 침입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이를 대파(大破)하고, 그 공으로 파면 이전의 관작으로 복직되었다.

    1218년에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거란족의 침입이 날로 심해지고 관군이 유약해 복속시키지 못하자, 다시 서북면원수가 되어 김취려(金就礪)·정통보(鄭通寶) 등을 인솔하고 출정하여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이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웅거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몽고·동진(東眞) 군대와 연합해 강동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강동성전투가 종결되자 몽고군 원수인 합진(哈眞)과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 그 내용은 고려가 매년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몽고에 세공(歲貢)을 납부한다는 것이었다. 형제맹약의 체결은 당시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의사와는 반대되는 것이었으나, 조충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이를 지지하였던 추밀원부사 최우(崔瑀)와 대몽화의론자들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진 것이다.

    조충은 개선하여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判禮部事)에 오르고, 곧이어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修國史)가 더해졌다.

    조충이 세상을 떠나자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이 추증되었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정공 조충의 묘는 북한땅 개성군 상도면 연동의 고려 태조왕비제능 서편 언덕에 있었다. 고려 고종 묘정에 배형되었으며, 조선 왕조 시대에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형되었다. 그러나 고려 고종 때 몽고족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조정이 옮겨가고 국토가 폐허화될 때 문정공의 묘소도 흔적조차 없어졌다.

      1926년 가을에 문정공의 외후손 최씨에 의해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 묘를 잃어버린지 707년 만에 분묘를 재수하고 후손들이 가을에 제형을 올렸다. 그리고 6·25동란 전인 1948년 봄에 횡성군 우천면 정암리 망백으로 옮겨왔다. 이 문정공 묘를 정암리에서는 큰 산소라 부르기도 한다.

    <횡성조씨 종친회 사이트에서 인용>


    문정공 조충 지석

    고려 중기의 문신 조충의 묘에서 출토된 지석.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청석제로 가로 89㎝, 세로 55㎝, 두께 4㎝이며, 이면은 거칠게 다듬었고 전면에만 명문이 있다. 전면 윤곽에는 정교한 당초문을 새기고, 그 안쪽에 테두리선을 그었으며 글씨는 종선을 긋고 새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강원도 유형문화재110호

    문화재명칭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지석)

    소재지

    강원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산207-1(네비: 횡성읍 정암리 558)

    관리자(연락처)

    횡성조씨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위치

    ▼ 담약(湛若) 조충(趙冲) 신도비는 마을 안쪽 송림에 위치해 있다.

    ▼ 담약(湛若) 조충(趙冲) 장군 사당 세덕사 원경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전경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석물이 많은 편이다.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근경... 묘역에 수기가 가득하다.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장명등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비

    ▼ 담약(湛若) 조충(趙冲) 구 묘비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백호방...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청룡방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석물들...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입수도두... 푸석푸석하다.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후경... 안산은 고형산 묘 현무봉이며 조산은 고형산 묘 안산인 보개삼태사이다. 맥이 머물지 못하고 흘러내린다.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청룡방 후경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 백호방 후경

    ▼ 담약(湛若) 조충(趙冲) 장군 신도비 근처에 있는 사선생비(四先生碑)

    ▼ 사선생비(四先生碑)...사선생비는 횡성조씨 조린과 조정립, 청주정씨 정곤수와 정구의 공적을 기린 비석으로, 원래는 공근면 매곡리 차계서원에 있었던 비석이었는데 서원철폐로 없어질 뻔했는데, 홍수가 나 하천에 매몰되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고,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 담약(湛若) 조충(趙冲) 묘지석(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정공 조충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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