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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碩礎 채영석의 간산기) 상주지역 간산기
    풍수이야기/풍수간산기 2011. 2. 12. 15:07

     

    금번 실시한 제 19차 상주지역 간산에 참여해주신 회원들과 진행을 맡은 임원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간산은 가을 거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혼사, 시제 등의 행사가 겹쳐 애당초 참석희망자가 부진할거라 예상은 하였지만, 그동안 화창하고 양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영하권으로 떨어지면서 사전에 예약했던 회원들까지 불참하는 등 극히 저조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방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뜻깊은 간산이 되었음을 상고드립니다.
    특히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인들과 함께 참여하신 대구한의대의 일원선생께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씀, 홈페이지의 글로 대신합니다.
    또한 빠듯한 일정과 영하권의 날씨로 인하여 현장에서의 간산 설명이 불충분했던 점을 상기하면서 상주에서 실시한 간산지를 일부 회고하며, 간산 후기로 대신합니다.

     날씨가 추워 어정쩡한 모습

     간산의 한 때
    1) 퇴제(退齊) 권찰도 묘 <상주시 공검면 율곡2리>
     이곳 묘소는 연산군 때 대제학을 지낸 퇴제의 음택으로 영남지방에서 전하는 잉어명당으로 더 유명한 곳이 되었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이곳에 터를 정하고 길을 떠난 지관이 무덤을 두 자 이상 파지 말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퇴제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무시하고 깊이 파 내려가다 석자쯤 팠을 때 갑자기 잉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앞의 연못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이미 잉어가 튀어나간 묘소이기 때문에 명당의 발음(發蔭)도 끝난 줄 알았는데, 얼마후 퇴제의 아들이 호조판서가 되고, 손자가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손녀는 중종의 며느리가 되어 8대까지 줄곧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이곳 묘역을 오르면 아래쪽에 상석과 제단이 설치되었고, 경사를 따라 다시 오르면 지금은 원분(圓墳)으로 치장한 원래의 팔각형 석축 위로 봉분과 함께 망주석, 상석 등이 또 설치되었다. 이곳 묘소는 정경부인 풍산김씨와 합폄(合폄)된 묘다.
    봉분 뒤로 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오르면 꽤 넓다고 느껴지는 입수도두(入首倒頭)가 나타난다. 이곳에 서서 시야를 주산에 옮기면 입수룡을 탯줄처럼 길게 연결시킨 숭덕산이 양팔을 벌리고 혈장을 옹골지게 포옹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낙맥된 입수룡은 좌우로 꿈틀꿈틀 위이(위이)로 길게 진행하여 도두(到頭)아래에서 식(息)인 입수처(入首處)를 구성하고, 언덕을 뛰어넘듯이 비룡으로 올라와 펑퍼짐한 잉처(孕處)로 매김되는 만두(巒頭)가 선명하다. 이곳 묘역은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예나 다름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당판에는 아직도 희미한 선익(蟬翼)자국과 함께 전순(氈脣)아래로 여기(餘氣)의 응집이 느껴지는 교과서적인 명당이다.
    그러나 이곳 묘소의 결함도 크다. 입수룡의 역량을 판단하는 주산(숭덕산)이 아직 탈살(脫殺)이 덜된 암반(岩盤)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주산에서 길게 탯줄로 이어가는 입수룡과 입수처를 지근에서 보호하는 보룡사가 전무하여 협곡을 따라 형성되는 바람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흠이라면 묘소가 정혈처(定穴處)보다 아래로 살짝 빗겨 터를 정한 것과 명당이 광활하고, 안산이 멀다보니 재혈(裁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탁 터진 명당 국세를 보면 우측이 약간 높은 지형을 이루면서 묘소의 천지 배합수(配合水)도 우선(右旋)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전답사 때만 하더라도 온통 사방이 숲과 잡풀을 이루면서 정확한 판단이 곤란하여 내명당의 지형조건에 따라 간산안내에 우선수(右旋水)로 명시하였다. 그러나 잡초 등이 정리된 상황에서 다시 한번 과당수 여부를 살펴본 결과 천수(天水)시 묘소 앞을 감고 흐르는 물은 묘역과 경계를 이루는 포장된 농로가 우측보다 좌측이 더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어 길을 물로 본다거나, 또는 묘전(墓前)에서 입을 맞추는 일차(一次) 배합수로 매김되면서 좌선수(左旋水)가 분명하다. 묘향(墓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에 곤신파(坤申破)로 정묘향(正墓向)이다.
     권찰도 묘역
     묘소 전경

     입수처에서 비룡으로 치오르는 도두맥
    2) 나재(懶齋) 채수(蔡壽) 음택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안산너머 전방에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연맥이 공검면 동막리의 국사봉(國寺峰)을 일으키고, 이곳 묘소의 외백호로 매김되는 동북쪽으로 진행하다가 218고지에서 동서(東西)로 맥을 갈라, 동쪽으로 나간 지맥이 이곳 묘역의 주산(主山)인 숭덕산(崇德山)을 일으킨다. 여기서 208고지의 현무봉(玄武峰)을 일으키고 남향받이로 터를 댄 율곡리(栗谷里)로 한 맥을 내려보낸다.
    묘역은 당판 좌측으로 봉긋한 도두(到頭)를 일구기 전, 현무봉에서 낙맥(落脈)한 입수룡이 수 차례의 과협(過峽)과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면서 몸통을 요란스럽게 흔들어대며, 진행하는 위풍당당(威風堂堂)한 생룡(生龍)으로 매김된다. 당판 바로 뒤에서 해룡(亥龍)의 입수일절(入首一節)로 머리를 들이민 입수맥은 채수라는 영남의 걸쭉한 망자가 영면(永眠)하는 음택(陰宅)에 생기를 공급해주고, 느슷한 비룡(飛龍)으로 기어오른 도두룡(到頭龍)은 팔을 벌려 당판을 둥글게 포옹하여 천조지설(天造地設)의 사성(莎城)을 일구면서 측맥(側脈)으로 매김되는 사래결작(斜來結作)으로 혈장을 만들고 묘역입구 도로변에 조성된 신도비 광장 앞까지 나가 우뚝 멈춰 선다.
    이곳 묘역에서 국세를 관망하면 우측 외백호(外白虎)가 몸통을 90 도로 꺾어 당판에서 손을 내밀면 닿을 듯이 가까운 백호 안산(案山)이 되어 마치 야자형(也字形)의 물형(物形)처럼 보여, 채수 묘가 야자 중앙 획인 곤(I)의 중심부에 터를 점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형도나 위성도를 참고하면 이곳 백호자락은 청주곽씨와 창령조씨 일가의 족분(族墳)이 자리잡은 또 하나의 용맥이 있어 야자(也字)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위성도 참고)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우선수(右旋水), 병오파(丙午破)가 되어 살인소황천(殺人小黃泉)이다.
     위성사진

     채수 묘역 전경

    3) 청주곽씨(곽존중), 창령조씨(조계권) 족분 묘역 <채수 묘의 백호자락>
     채수 묘에서 보면 마치 백호자락으로 매김되지만 실제로 이곳에 서면 숭덕산에서 낙맥된 수 개의 용맥 중에 중출룡(中出龍)에 해당되며, 이곳 일대에서는 수맥(首脈)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모름지기 주혈(主穴)의 조건에 드는 산진처(山盡處)란 이곳 용맥처럼 두면(頭面)이 일직선으로 곧게 흘러야 한다. 만약 진행하는 용맥이 좌나 우로 몸통을 휜다면 그것은 본신(本身)에서 혈을 맺는다기보다는 좌변(左邊)이나 우변(右邊)의 용을 호종(護從)하거나 보호하고자 하는 보조룡(補助龍)에 불과하다.
    동일 용맥 선상의 위쪽은 조계권을 포함한 창령조씨 들이 점했고, 아래쪽은 곽존중을 비롯한 그의 족분(族墳)터다. 과연 어느 성씨가 정혈처(定穴處)를 선점한 것일까?
    용맥의 상처(上處)에 조성된 창령조씨 조계권의 음택에 올라 전방(前方)을 조망하면 안산너머로 겹겹으로 장막을 치고 굽이굽이 전개되는 백두대간의 연맥이 장관을 이루면서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나지막한 안산을 눈 아래로 깔보고 응시하게 되고,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경도(傾倒)되는 명당이 훤하게 모습을 들이미는데,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아 그러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지만, 웬만한 천수(天水)시에도 횡류수(橫流水)로 급하게 이동하는 물길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그러나 용맥의 아랫자락을 점한 곽존중의 음택은 사세(四勢)가 완벽하게 보듬으면서 수구를 관쇄(關鎖)하고, 비스듬한 안산의 아랫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물길을 자연스럽게 수용함으로써 귀(貴)보다는 재(財)의 발응을 짐작케 한다.
    이곳 묘역을 일군 용맥은 여인의 유방처럼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사상혈(四象穴) 중 유혈(乳穴)을 맺는다. 유혈은 사상 중에 소음(少陰)에 속하며, 대개 용맥의 아래쪽에서 혈을 맺는 유두혈(乳頭穴)과 중간에서 혈을 맺는 현유혈(縣乳穴), 위쪽에서 맺는 수유혈(垂乳穴)로 구분하는데, 이곳은 볼록한 혈장에 약간 오목한 유중미와(乳中微窩)로, 작은 혈(穴)을 감추고 있어 위쪽의 창령조씨보다는 아래쪽의 청주곽씨의 음택이 정혈에 가깝다.

     창령조씨 조계권 음택에서

     청주곽씨 곽존중의 음택

     동일묘역에 터를 댄 창녕조씨와 청주곽씨의 족분

    4)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음택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만학풍천에 빗장 걸어 닫고 홀로 있으니 (萬壑風泉獨掩),
    긴긴 해 계정에 찾아오는 나그네 없도다 (日長無客到溪亭).
    해질녘 정신 지쳐 서책 버려 두고 나오니 (晩來意倦抛書出),
    눈부신 신록의 그늘 뜰 안에 가득하구나 (潑眼新陰綠滿庭).

    이 시는 우곡잡영(愚谷雜詠) 20 수 중에 계정(溪亭)을 읊은 것으로 우복의 막내 사위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복종택(愚伏宗宅) 주변의 풍광을 시(詩)로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우복' 선생하면 망인이 영면하는 음택(陰宅)보다는 그의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우산리의 청간정(聽澗亭)을 먼저 떠 올리게 되고, 실제 역사나 문학, 풍수를 공부하는 학인들도 이곳보다는 종택에 더 관심을 보이는 연유이다.
    우복선생은 14번이나 대사헌으로 임명된 고관대작의 반열에 들었지만, 고향에 내려오면 우산리 산중으로 들어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계정에서 청검하게 평생을 지냈다. 그만큼 우복은 청렴한 인물로 상주는 물론 영남을 대표하였다.
    홍재전서에서 정조(正祖)가 영남 출신 관료들과 영남의 인물 개황을 요약할 때, 조선 최고의 영남 출신 선현(先賢)으로, 함양의 정여창, 금산(金山, 지금의 김천시 일대)의 조위, 안동의 권벌, 경주의 이언적, 예안의 이황, 진주의 조식, 성주의 정구, 상주의 정경세, 인동(仁同, 지금의 구미시 일대)의 장현광 등, 9 사람을 꼽았다.
    이곳 묘소는 백두대간이 일으킨 국사봉에서 낙맥된 연맥이 서에서 동으로 진행하면서 상하기복(上下起伏), 위이(위이)와 천전과협(穿田過峽)으로 수리(數里)를 진행하다가 묘역 뒤, 과수원 아래에서 과협(過峽)으로 오르면서 펑퍼짐하게 퍼진 완맥(緩脈)으로 고개를 쳐들고는 가운데가 둥글면서 오목한 와중미돌(窩中微突)의 당판을 일구었다. 후룡(後龍)의 형세가 낮고 지지부진하다 보니 고개를 가로 젖는 학인들도 있지만 당판에 서서 앞을 관망하면 어느 것 하나 이곳 터를 시샘한다거나 홀대하는 사격(砂格)이 없고, 아스라이 넓게 전개되는 전답(田畓) 명당을 품안에 두르면서 묘역을 응기(應氣)하는 평온(平穩)함 그 자체로 다가와 청렴한 삶을 우선으로 삼았던 우복의 일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이곳 묘역은 와장(窩場)의 터를 일구면서 돌기(突起)한 도두(到頭)에서 좌우로 둥글게 감싸며 끝자락을 살짝 안으로 만곡(彎曲)한 현릉(弦凌, 소뿔 같은 형상)과 선익사(蟬翼砂, 매미의 날개)가 선명하여 혈(穴)로 단정짓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다. 현릉과 선익사는 혈이 간직한 정기가 옆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호막을 치고, 혈장 밖에서 지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과 지표수(地表水)가 안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와형(窩形)의 필수요건으로 전순(氈脣)을 풍족하게 늘어뜨리고 있어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조건을 구비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과수원과 논으로 이용되는 둔덕은 묘소를 조성할 당시 내백호(內白虎)가 되어 관쇄(關鎖)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 전형적(典型的)인 와혈에 사신사(四神砂)가 완벽한 형기론(形氣論)에 부합하는 최상의 입지(立地)였음을 판단할 수 있다.
    이곳 묘소의 발응은 평지(平地)의 와혈이란 점과 신좌을향(辛坐乙向)을 놓아, 귀(貴)보다는 손(孫)과 부(富)의 영향으로 나타나는데, 재물보다는 자손의 번성(繁盛)을 더 예고하고 있다.

    모름지기 진정한 풍객(風客)이라면, 당판에 올라 대충 관산(觀山)식으로 산천을 살피거나, 또는 명당의 국세나 사격(砂格)을 보고 결론을 내리는 작대기풍수를 지양하고, 옛 선사들이 했던 발 품을 들여, 내맥(來脈)의 진위(眞僞)여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즉, 혈(穴)을 잉태시킨 부모(父母)인 용세(龍勢)의 역량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요, 자식(子息)인 혈을 살피는 것은 다음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래서 터를 살필 때는 순차(順次)가 있다. 먼저 부모봉(父母峰, 입수봉)과 현무봉(玄武峰), 주산(主山), 조종산(祖宗山)의 내력 등을 살펴 행도(行度)하는 산세(山勢)의 역량을 살피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개장천심(開帳穿心), 요도지각(橈棹地脚), 박환(剝換), 과협(過峽), 용맥을 이어주는 영송(迎送)여부, 주룡을 따라붙는 보룡사(補龍砂)유무를 면밀히 검토한 후에 용맥으로 이어지는 정기를 혈로 응집(凝集)시키는 입수처(入首處)의 역량을 판단해야 한다. 입수는 기복굴곡(起伏屈曲)의 변화로 나타나는 취기입수(聚氣入首)와 용신(龍身)을 조이는 결인속기입수(結咽束氣入首), 암석으로 일군 암석돌출입수(岩石突出入首)가 있는데, 이것이 입수의 격(格)을 결정짓는 입수삼격(入首三格)이다. 그런 다음 혈장으로 내려와 산진처(山盡處)여부와 산수(山水)의 배합여부, 혈의 사과(四科)로 혈형(穴形, 와겸유돌), 혈성(穴星), 혈증(穴證), 혈기(穴忌)를 꼼꼼히 살피고, 개점의당(蓋粘倚撞), 탄토부심(呑吐浮沈)등의 법수로 점혈(占穴)과 재혈(裁穴)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요즈음 풍수계를 보면 이기(理氣)는 문외한(門外漢)으로 형세(形勢)가 풍수의 전부인 양 주장한다든지 형세(形勢)와 패철의 법수는 제쳐두고 이상스런 이기(理氣)만을 고집하는 부류도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풍객이 취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풍수의 이치나 이론을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하고 답사(踏査)에 목숨을 거는 강호파(江湖派)나, 지가서를 달달 외워 강단에 섰으면서도 정작 현장 용사(用事)나 간산에는 사리에 맞지 않는 행태나 주장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강단파(講壇派)도 있다. 또한 모든 풍수를 평정이라도 한 듯이 매스컴을 등에 엎고 자신의 무식과 우매함을 세상에 과시하는 꼴불견도 보인다.
    모름지기 우리는 풍수의 이론이 제시하는 바를 통달한 연후에 그에 대한 비판을 스스럼없이 수용하는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본다. 즉, 풍수의 궁극적 목적은 배운 것을 토대로 현장에 나가 지기와 천기를 묘용(妙用)할 줄 아는 진정한 풍인의 반열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산을 생략한 이론은 부질없는 것이며, 이론을 무시한 간산도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우복 정경세 음택

     우복 음택에서 간산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일원 유재백 선생

     괴암 김우굉 음택

     사벌왕 상산박씨 릉

     정기룡 장군 음택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소장  碩礎 채영석 선생님 간산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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