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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장릉, 양주온릉을 다녀왔습니다...답사는 즐거워/조선왕릉답사 2007. 4. 16. 00:12
아침 안개에 휩싸인 장릉 전경
답사를 출발하기 전에는 늘 기대감에 술렁인다. 처음에는 야유회 간다고 생각하고
다녔는데 근자에는 오히려 뭔가에 쫒기는듯 부지런을 떨기 일쑤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탓일게다.
꽃길을 이룬 장릉 산책로...
답사인원이 많지 않아 승용차로 출발하여 김포장릉에 도착했다. 이곳은 왠지모를
거부감에 여러차례 방문할 기회를 스스로 미루고 있었는데 이날 드디어 답사팀들과
함께 했다. 인조반정에 대한 내 생각 때문에 그의 친부인 원종의 릉까지도 내 마음의
편린이 미쳤으니 이런 것도 소심함의 증거이리라...
장릉의 방지원도... 무릉도원이다..
조금 이른 시각이라 다른 일행들이 도착하지 않아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 먼저
장릉으로 들어갔다. 입구의 방지원도에 벚꽃이 화사하여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로 인해 왕릉의 아침은 아스라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서둘러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입구로 나오는데 남은 일행들을 만나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
되었다.
꽃대궐을 이룬 장릉 재실...
김포장릉의 능역은 상당히 큰 편이다. 재실 아래로도 멀찍이 산책로가 나있는데우리는 연못으로 해서 능으로 바로 올랐다. 봄꽃이 제철이라 눈맛이 그만이었고
숲이 넓어 새소리가 참 많이 들린다.
산신석에서 본 장릉 능상...
장릉(章陵)은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생부모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추존 왕릉이다. 원종은 선조의 5번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지고 임진왜란 때
부왕을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으며, 1619년에 돌아가셔서 양주 곡촌리에
묻혔는데 그의 아들인 능양군(인조)이 반정에 성공하여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추숭하고 인조 5년에는 김포의 장릉산으로 천장하면서
흥경원(興慶園)으로 묘역을 조성하였다. 인조10년에는 이귀 등의 주청에 따라 다시
원종이라는 묘효와 함께 능호도 장릉으로 칭하여 석물도 왕릉제로 개수하였으며,
조선 왕조 최초로 추숭 왕릉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장릉은 금천교에서부터 홍살문, 정자각, 능상 등이 가파른 언덕을 형성하고 있어
장릉의 참도와 정자각... 상당히 가파르다..조금은 색다른 왕릉이다. 이런 형태는 지형의 특성이 있겠지만 강한 왕권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형태가 되고 있다. 고려 때 화엄종에서 많이 보여지고 있는
가람배치가 이런 형태이기도 하다. 반정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인조대왕 나름대로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생각해본다.
장릉 곡장 뒤에서 본 풍경.. 청룡과 백호가 환포하고 멀리 계양산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참도를 올라 정자각까지의 길도 근자에 새로 복원을 해서 박석을 모두 깔고
깔끔하게 정비를 해놓은 것 같다. 수복방도 복원하고... 능원 사초지와 능상에서는
인부들께서 한참 잡초제거로 분주하다보니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날씨마져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조산으로 있는 계양산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장릉의 석물.. 새로 한듯 깨끗하다...
장릉의 석물들은 새로 한듯이 아주 깨끗한체 보존이 잘 되었다. 추존왕릉이 되다보니
둘레석이 없는 것만 제외하면 왕릉에 갖춰진 석물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오히려특이한 몇가지들이 있었는데 혼유석이 무척 크고 뒤로 배례석이 있으며 아래에는
네조각으로 판석을 깔은 것 등 공부거리가 많았다.
혼유석 뒤로 있는 배례석(?).. 이것의 용도는??
뒤로 돌아 곡장 뒤에서 바라보니 좌청룡 우백호가 휘감은 형세가 아주 힘이 넘친다.
멀리 조산으로 계양산이 있다고 하는데 안개로 보지 못했다. 한가지 장릉으로 들어오는
입구 매표소 쪽이 약하여 장손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곳에 길을 내서
장릉 진입로를 만들었다.
장릉 정자각 창문 사이로 본 능상...
또한 장릉 뒤편 주산에 해당하는 곳에 군부대가 주둔을 하고 있는데 인조반정에 따른
업보의 일환으로 군화로 장릉을 짓누른 형상을 보는 것 같았다. 살아 생전에 많은
공덕을 쌓아야 사후에도 편안한 곳, 덕이 묻어나는 곳에 묻히게 되는게 세상만사
이치인 것을... 아들의 업보를 아버지가 받는 꼴이니...
온릉 안에 있는 관리인 사택... 재실인줄 알았는데 재실은 1970년대 도로확장 공사 때 철거됐다 한다...
장릉을 떠나 양주 땅 장흥으로 가서 온릉을 만났다.
그러고보니 이날 답사는 반정으로 인한 관련인물들이란 공통점이 있는것 같다.장릉의 주인공 원종과 온릉의 주인공 단경왕후는 반정에 관련된 세세한 사실들이야
크게 다르고 살아생전의 귀천 또한 엄청난 차이지만 후대의 답사객이 보기에
굳이 공통점을 찾아보고 싶어서 해본 소리다.
온릉 전경.. 움푹 들어가 있어 온화하다..
온릉(溫陵)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첫번째 비인 단경왕후 능인데 중종이 세자일 때
혼례를 올렸으며,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 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나
7일만에 폐비가 되어 사가에 머물다가 명종 12년 71세로 소생없이 승하하여 일반 묘로
안장되었으나 영조 15년에 복위되었다.
온릉 능상...
온릉은 글자 그대로 따뜻한 릉이다. 손바닥처럼 폭 들어간 곳에 묘가 있어서 더욱
온화한 느낌이 든다. 겨울에 답사를 하면 그 느낌이 더욱 좋을듯 하다.
예전에 이 근처에 근무를 할 때 이곳에 릉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보니
내가 자주 지나치던 곳이었다. 그 이유를 관리인께서 알려주셨다. 원래 이곳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가 온릉을 정비하면서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고...
온릉 입구... 비공개 릉이지만 관리인께 허락을 얻고 들어갈 수 있다..
온릉은 비공개 릉이지만 사전에 고양지구관리소에 양해를 구하거나 현지 관리인께
말씀드리면 출입이 가능하다.
원래 왕릉 답사기는 역사적 사실은 생략한체 느낌 위주로 적는데 그래도 꼭 필요한몇가지는 밝히지 않을 수 없어 적게된다.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는 신수근인데
중종반정의 핵심세력인 박원종이 반정에 가담하라고 권유했지만 신수근의 입장에서는
연산군이 매제이고 중종도 사위인 만큼 선뜻 나설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를 거부하다
반정세력들에게 형제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단경왕후도
폐비할 수밖에 없었다. 단경왕후와 중종간의 애뜻한 사연은 치마바위전설로 잘 알려져 있다.
온릉의 오른쪽 망주석... 세호가 내려오고 있다...보통은 올라가는데....
온릉이 있는 산은 원래 신씨들의 땅이었으나 반정세력들이 빼앗아 자기들의 조상들묘를 썼다한다. 그러다 단경왕후가 복원되어 왕릉으로 되자 왕릉 주위 10리에 묘를
조성할 수 없다는 규칙에 걸려 모두 다른 곳으로 파묘를 당했다고 하니 이 또한
살아생전 음덕을 깊게 쌓아야 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온릉 곡장 뒤에서 본 안산과 조산... 멀리 조산은 부봉으로 돈 걱정이 없을듯...
온릉은 능 바로 앞에 안산이 바짝 다가와 있어 답답함이 느껴지고 주위 사격도
별다른 것이 없으나 멀리 조산은 우렁차게 솟아있어 후손들이 돈 걱정은 안했을
듯 한데 기실 왕후는 소생이 없었으니 누가 그 돈을 다 썼을까나...ㅎㅎ
온릉의 문인석과 석마... 석마의 입주위가 깨져있다...
온릉을 방문하기 전에는 원한에 사무친 한 여인의 일생을 생각하며 갔었는데 막상
가서보니 그런 느낌보다 온화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사릉에
갔을 때는 어쩐 일인지 막연히 측은함이 들었는데 온릉에 와서보니 그런 마음보다는
편안함이 든다.
사릉이 서향이고 온릉이 남향이라 그런 면도 있고 실제 답사할 때 사릉은 오후에,
온릉은 오전에 답사를 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사릉은
왕권을 빼앗아간 세조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는 정순왕후의 릉이어서 더욱 그렇고
온릉은 지아비에 대한 사무침일 뿐 어떤 원한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도 같다. 이게 나만의 느낌일까?...
온릉의 묘비... 총탄자국이 여러 곳에 나있다..
온릉의 비각에 있는 묘비에는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능원에 있는 문인석 옆의 석마는 입주위가 깨져 있었고 장명등 창으로도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는 등 전쟁의 상흔인지 아님 무지한 자들의 소행인지 답사
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조금 특이한 것은 망주석의 세호가 일반적인 왕릉과는
달리 청룡쪽에서 내려가고 백호쪽에서 올라가는 형태를 취했다.
온릉 옆 능선에 있는 파묘의 석물...
온릉 옆 능선에 과거에 묻은 석물들이 불쑥불쑥 드러나 있는데 이는 신씨들이
멸문지화를 당할 때 역적이 된 가문의 묘를 이장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정의
의도대로 묘를 아예 없애버리고 석물들은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었는데 세월이 흘러
지금 그 석물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관리인께서 알려줬다.
엎어져 있는 묘비... 뒤집어 묘비명을 확인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묘비 하나가 엎어져 있어서 그 내용을 보려고 장정 넷이서 뒤집을려고 했으나
역부족으로 묘비명을 확인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장릉과 온릉을 답사하면서 사필귀정이란 사자성어가 나를 떠나지 못하고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 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하지만 답사에서는 또다른 느낌이
있어 어떤 때는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장릉의 뒷산 현무봉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거라든가 온릉 주위에서 한동안 주둔했던 군부대가 떠나고 지금은 온화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전날 날씨가 엄청 추워서 두꺼운 옷으로 무장하고 답사를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땀을 많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감기 기운이 돌아 혼이 났다.
답사는 하기 전에는 설레이게... 할 때는 즐겁게... 하고 나서는 행복하게... 해야 되는 것
아닐까...? 그래야 또 내일을 기약하고 또 다른 곳에 대한 호기심을 발걸음으로 옮길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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