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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군포]광성부원군 김만기 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8. 6. 10:00
김만기 선생 묘 답사
이기조 선생 묘를 나와 대야미역 부근에 있는 김만기 선생 묘를 찾았다.
우리 가문의 어른이라서 더욱 뜻 깊은 답사다.
몇 년 전에 석초선생님과 함께 왔었는데 오늘은 혼자서 돌아다니다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때쯤 답사는 묘역에 풀이 우거져있어 답사하기 무척 힘든 때인데
후손들이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묘역은 이 맘 때 쯤에 벌초를 한번 하기 때문에
아주 깨끗하고 멋진 묘역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광산김씨 묘역은 무척 잘 관리되어 있다.
김만기 선생은「구운몽」의 저자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형이다.
묘역 중앙에는 대형 분묘가 8개의 호석에 둘러싸여 있고, 그앞 왼쪽에는 묘표가있다. 오른쪽 앞에는 숙종 어필의 묘표가 있으며, 전면 좌우에는 8각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조성되어 있다.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묘표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이고, 숙종 어필의 묘표는 숙종 25년(1699)에 세웠다.신도비는 묘표와 마찬가지로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으로, 4각의 기단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첨석을 얹어 만들었다. 김만기 묘역과 신도비는 1992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김만기(金萬基)
1633년(인조 11)∼1687년(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 또는 정관재(靜觀齋).
형조참판 장생(長生)의 증손이며, 생원 익겸(益兼)의 아들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로, 작은아버지 익희(益熙)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 3)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정언·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57년 교리로서 글을 올려 《오례의》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했고,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있을 때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했다.
1671년 딸을 세자빈으로 들여보내고,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에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1674년 7월 병조판서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해 소를 올려 3년상을 주장했다.
그해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총융사(摠戎使)를 겸관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였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으며, 강만철(姜萬鐵)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아들 진규(鎭圭), 손자 양택(陽澤)의 3대가 문형(文衡)을 맡았다. 노론의 과격파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삭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석집》 18권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 기념물 131호
문화재명칭
김만기 선생묘 및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대야미동 158-4 재실)
관리자(연락처)
경기도, 광산김씨
▼ 광성부원군 김만기 선생 묘 사당과 재실..
▼ 김만기 선생 사당
▼ 광성부원군 김만기 선생 묘역 오르는 길
▼ 김만기 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판
▼ 김만기 선생 묘역 전경... 벌초를 말끔히 하여 보기 좋다.
▼ 김만기 선생 묘 전경
▼ 김만기 선생 묘
▼ 김만기 선생 묘... 고석을 보면 용이 새겨져 있다...
▼ 김만기 선생 묘비
▼ 숙종의 어필 묘비
▼ 김만기 선생 묘 백호쪽 문인석과 망주석
▼ 김만기 선생 묘 청룡쪽 문인석과 망주석
▼ 김만기 선생 묘 석물
▼ 김만기 선생 묘 비좌... 문양이 특이하다.
▼ 김만기 선생 묘 상석과 향로석, 고석... 정성이 느껴진다.
▼ 김만기 선생 묘 입수처... 힘이 느껴진다.
▼ 김만기 선생 묘 후경...
▼ 김만기 선생 신도비... 묘역 아랫쪽에 위치해 있다.
▼ 김만기 선생 신도비 전면과 후면
김진구(金鎭龜)
1651년(효종 2)∼1704년(숙종 30). 조선 숙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영돈령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들이고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수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정언·헌납·교리·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 경상감사가 되었으며 이어 승지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에 의하여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가혹한 수법으로 남인을 숙청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풀려나 호조판서에 기용되고, 곧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도승지·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서 1696년 강화부유수·세자가례부사(世子嘉禮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형조·공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한 뒤 1700년 지돈령부사·어영대장·수어사 등을 거쳐, 이듬해 우참찬·좌참찬, 170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헌(景獻)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김만기 선생 묘 아래에 위치한 아들 김진구 묘
▼ 김진구 선생 묘
▼ 김진구 선생 묘비
▼ 김진구 선생 묘 문인석
김춘택(金春澤)
1670년(현종 11)∼1717년(숙종 4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아버지는 호조판서인 진구(鎭龜)이며,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인 만기(萬基)이다. 증조모 윤씨에게서 학업을 익히고, 종조부 만중(萬重)으로부터 문장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金壽恒)의 탄복을 받기도 하였다.
서인·노론의 중심가문에 속하였으므로 항상 정쟁의 와중에 있었으며, 특히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로 남인이 정권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여러 차례 투옥, 유배되었다. 1694년 재물로 궁중에 내통하여 폐비 민씨를 복위하게 하고, 정국을 뒤엎으려 한 혐의로 체포되고 심문받았으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면서 풀려났다.
그뒤 노론에 의해서는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으나, 남구만(南九萬) 등의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 정치활동을 행하였다고 공격받았다.
1701년 소론의 탄핵을 받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으며,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모해하였다는 혐의를 입어 서울로 잡혀가 심문을 받고, 1706년 제주로 옮겨졌다.
시재가 뛰어나며 문장이 유창하였고,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저서로 《북헌집》 20권 7책과 《만필(漫筆)》 1책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김진구 선생의 장남인 김춘택 묘
▼ 김춘택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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