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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군포]정난종 선생 묘역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8. 8. 10:00

    정난종 선생 묘 답사 

     

    동래정씨 정난종 선생 묘역은 100대명당에 들어가는 곳이다.

    예전에 뙤약볕아래에서 답사한 기억이 나는데 현장에 가기전에는 잘 생각이 안난다.

    그러다보니 가본 곳을 또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어차피 인근에 있는 효종의 따님인 숙정공주 묘를 갈 요량이었으니 거쳐가는 곳이라 그래도 나았지만

    한번 간 곳을 잘 기억해 내지 못해 또 찾아갈 때는 괜시리 내 자신한테 한마디 한다..

    어이구 이 돌대가리...ㅎ

    조선 세조때의 명신인 정난종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장자 광보, 차자 광필,그리고 광필의 넷째 아들 복겸과 6세손 주손, 진원의 묘 등이 산등성이의 중턱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열을 지어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각각의 묘에 대한 신도비와 혼유석,석등,동자석,문인석 등과 함께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어, 조선전기의 분묘사 내지 석비,금석문 등 고고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재료가 되고 있다.

    묘역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남곤이 지었고,글씨는 둥지중추부사 강징이 쓴 것이다. 한편,차자 정광필(1462~1538)선생의 자는 사훈,호는 수천으로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때 영의정으로 조광조 등을 구하려다 파직뒤에 퇴계 이황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칭송을 받았다.시호는 문익이며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좌찬성 양곡소세양이 지었고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군포에 있는 동래정씨 동래군파 묘역의 배치는 맨 위에 정유신(鄭惟慎, 영의정 정광필의 3자 정익겸의 차자), 우측 옆으로 정휘겸(鄭撝謙, 정광필의 차자), 정유신의 묘 아래에 정복겸(鄭福謙, 정광필의 4자, 좌의정 정유길의 아버지), 그 아래 영의정 문익공 정광필(鄭光弼), 우측 옆으로 정유청(鄭惟淸, 정익겸의 4자), 정광필의 묘 아래에 정광보(鄭光輔, 정광필의 맏형), 그 아래 동래정씨 동래공파 파조 익혜공 정난종(鄭蘭宗)의 묘가 있으며, 그 아래 후손들의 묘가 2~3기 더 있다.<개미실사랑방에서 발췌>]




    정난종(鄭蘭宗)

     

    1433년(세종 15)∼1489년(성종 20). 조선 전기의 명신·서예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 사(賜)의 아들이다.

    1456년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대교·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영안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재차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우참찬·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특히 조맹부체(趙孟頫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에 《원각경 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원각경》의 자체가 고르기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 파고다공원의 〈원각사비음 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 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윤자운신도비 尹子雲神道碑〉·〈윤자운묘표〉, 연산(連山)의 〈김철산비 金鐵山碑〉가 있으며,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 洛山寺鐘銘〉, 고성의 〈유점사종명 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 奉先寺鐘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 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이 보기 드물며, 《관란정첩 觀瀾亭帖》·《해동명적 海東名跡》·《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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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연락처) 

       경기도 기념물 115호
       정난종 선생묘 및 신도비 외 묘역일원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3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1 재실
      


     

     

     

     

     

     

     

     

     































    ▼ 정난종 선생 묘역 안내문 

    ▼ 정난종 선생 묘역

    ▼ 정난종 선생 신도비

    ▼ 정난종 선생 묘

    ▼ 정난종 선생 묘

    ▼ 정난종 선생 묘 장명등

    ▼ 정난종 선생 묘 전경

     


    정광보[鄭光輔, 세조 3년(1457)~중종 19년(1524)], 


    자는 운지(運之), 본관은 동래, 증조부는 정귀령(鄭龜齡), 조부는 정사(鄭賜),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의 맏아들이다. 외조부는 이지지(李知止), 배위는 대호군 이격(李格)의 따님 전의이씨이다.

      슬하에 4남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한룡(漢龍), 둘째는 사룡(士龍, 대제학.공조판서),셋째는 원룡(元龍), 넷째는 언룡(彦龍)이다. 딸 맏이는 이희업에게, 둘째는 박종상에게, 셋째는 이윤우에게, 넷째는 이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한룡의 아들은 순우(純祐)·순지(純祉)·순복(純福)·순호(純祜)이고, 언룡의 아들은 순하(純嘏)이다.

      공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음보로 관직에 나가 공을 쌓아서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경관(京官)으로 첨정·통례원 봉례를 지냈으며, 외관(外官)으로는 각 고을 군수 외에 창원과 연안 두 곳의 부사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은 정광보를 창원공이라 칭한다.

    <블로그 개미실사랑에서 발췌>















    ▼ 정난종의 맏아들 정광보의 신도비...

    <정광보(鄭光輔) 묘비>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행 창원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 동첨절제사 정공묘갈명.

    찬(撰) : 대제학 이행(李荇), 서(書) : 형조참판 성세창(成世昌) 중종 20년(1525) 8월에 세움.

    ▼ 정난종의 맏아들 정광보의 묘... 부친 묘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 정광보의 묘

    ▼ 정광보의 묘비

    ▼ 정광보의 묘 석물

    ▼ 정광보의 묘 후경

    정광필(鄭光弼)

      
    1462년(세조 8)∼1538년(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으로부터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며, 신용개(申用漑)로부터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 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함으로써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영의정 정광필 신도비..


    ▼ 영의정 정광필 묘 전경

    ▼ 영의정 정광필 묘 석물 

    ▼ 영의정 정광필 묘 장명등

    ▼ 영의정 정광필 묘 후경

      
    정복겸[鄭福謙, 연산군 7년(1501)~명종 7년(1552)], 자는 경중(敬仲), 본관은 동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네 아들 중 막내아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완산이씨로 이수영(李壽永)의 따님이다. 아들 좌의정 임당공 정유길(鄭惟吉), 손자 좌의정 수죽공 정창연(鄭昌衍), 현손 영의정 익혜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좌의정 정지화(鄭知和)로 대를 이어 조정을 빛내는 가문이 되었다.

      정복겸은 아버지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혔기 때문에 자연히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얼마 후 김안로가 사사되고 공의 아들 정유길(鄭惟吉)이 정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에 정복겸은 “내 자식이 지금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임금의 은혜를 입었는데, 내가 만약 다시 박사 일에 종사하여 벼슬이 오르기를 구하는 것은 만족할 줄을 아는 자가 아니다”하고는 종신토록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정복겸은 음보로 강화부사를 지냈다.

    묘는 완산이씨와 쌍분으로 상석, 향로석, 혼유석, 족석, 계체석, 장명등, 동자석, 망주석이 있다.

    <블로그 개미실사랑에서 발췌>

     

     

     

     

     

     

     

     

     

     

     





    ▼ 정광필의 막내아들 정복겸의 묘... 부친 정광필묘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 정복겸의 묘

    ▼ 정복겸의 묘 앞 동자상... 입술이 너무 이쁘다..

    ▼ 정복겸의 묘비

     

    <동래정씨 묘역에 있는 나머지 묘들...>

    ▼ 정복겸의 3자 정익겸의 둘째아들 정유신 묘비

    ▼ 정유신 묘 후경


    <정유청(鄭惟淸) 묘>

    정유청(鄭惟淸)의 자는 직재(直哉), 본관은 동래, 증조부는 정난종(鄭蘭宗), 조부는 정광필(鄭光弼), 정익겸

    (鄭益謙)의 네째 아들이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다.

    선조 5년(1572) 별시 을과1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보덕(輔德,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치치던 종삼품의 관직, 

    정조 때 정삼품 당상관으로 격상됨)이 되었다. 

    ▼ 정유청 묘비

     

    <정난종6세손 정진원 가계도>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 -->부사 정광보(鄭光輔)-->현령 정한룡(鄭漢龍)-->목사 정순우(鄭純祐)
    -->봉산군(蓬山君) 정상철(鄭象哲)-->봉해군(蓬海君) 정진원(鄭震遠)

    ▼ 정난종의 6세손 정진원 묘... 정난종 묘 바로 아래에 위치

    ▼ 정난종의 6세손 정진원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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