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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공주]절재 김종서장군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2. 7. 10:00

    절재 김종서장군 묘

     

    능원묘 답사에서 김종서 장군 묘를 다녀왔는데 언제 다녀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 올릴려고 하니 아마도 어느 봄날인것으로 나온다. 아무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사진을 보고 판단해야

    될 것 같다.

    이곳은 신도비의 귀부가 거북이가 아닌 두꺼비로 되어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곳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 마을이 지네형상이라 거북이와 상극이라 두꺼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뭔가 오류가 보인다.

    아마도 마을이 지네형상이라 지네의 독을 누르고 물을 다스리기 위해 거북 대신에 두꺼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입구의 신도비를 지나 상당히 높은 계단을 올라 장군의 묘가 있다. 장군들의 묘가 대부분 정상쪽에서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는데 이는 아마도 장군대좌형을 떠올리며 병사들을 거느리는 형태를 취하려고 하는 것 같다.

    김종서(金宗瑞)
    1383(우왕 9)∼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할아버지는 지평 태영(台泳)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摠制) 추(錘)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해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實 : 실지 답사를 통해 수확량을 조사함)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 상황을 조사했고, 같은 해 10월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해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左代言)인 그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 : 이조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말을 놓아 기를 수 있는 곳의 수효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했으며, 이듬 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살펴 정했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 해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左贊成兼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했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올렸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 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육진 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 개척에서 이룩한 공로가 있어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엄정한 면모는 사헌부·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어 육진 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위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해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세종은 권제(權踶)·안지(安止) 등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 (鄭麟趾)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이 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해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그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 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이 즉시 편찬의 착수를 명해 이듬 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해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서의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제거되었다. 그 뒤 1678년(숙종 4)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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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물 제16호
       절재 김종서장군 묘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45
       순천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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