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경기 여주]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17. 10:00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및 신도비

     

    숙종의 국구 민유중선생은 명성황후 생가위에 묘와 신도비가 있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자주 접하게 되어 대략 누구라는 것은 알게된다. 요즘 언론플레이를

    좋아하는 풍수사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 국민들은 TV에 한 번 나오면 대단한 실력가로

    알아주다보니 돈을 내고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나같이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 사람들은 TV에 나오지 않아 알아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ㅎ 이런 것도

    능력이라면 나는 그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묘도 TV에 나오는 사람들 마냥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

    민유중선생 묘는 명성황후 생가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아는데 그의 형인 민정중선생은

    좌의정을 하고 서인의 대표인물인데도 잘 모른다. 그래서 내가 언론플레이를 좀 해드릴려고

    이렇게 답사기를 적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ㅎㅎ

    묘역은 한겨울에 찾았는데도 아주 포근하다. 앞의 명당도 평탄원만하고 멀리 조안산이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어 후손들이 길~게 발복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후손들이 땅을 팔았는지 묘자리만 제외하고는 개간을 하여 밭으로 만들어서 묘역이

    아주 옹삭하게 변했다. 좋은 자리인데 맥이 내려오는 내룡이 헐벗은 모양새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바빠도 잠시 엉덩이를 땅에 대고 물 한 모금 마시며 기를 받고

    내려오면 좋다. 묘지 답사를 하면 좋은 기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냥 지나치면 별 효과가

    없고 그곳에 앉아서 잠시라도 기를 받고 내려와야 효과가 크다.

    민정중(閔鼎重)
    1628(인조 6)∼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여준(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기(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9년(인조 27)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으로 뛰어나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賓)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그의 충성을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이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대사간으로 나아갔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삼사에 재직할 때는 청의(淸議)를 힘써 잡았고, 대사성에 있을 때는 성균관의 증수(增修)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해 선비 양성의 효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이듬 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이 때 호포(戶布) 등 여러가지 일을 실행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반대에 부딪혔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노봉연중설화 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 壬辰遺聞≫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 右相李浣碑>·<개성부유수민심언표 開城副留守閔審言表>·<개심사대웅전편액 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및 신도비
      
       여흥민씨


     

     

     

     

     

     

     

     

     

    **민유중(인형왕후 부친) 가계도
    민기   민광훈     민시중
     
     
      민정중
    (좌의정)
      민진장
    (우의정)
     
     
      민유중
    (숙종국구)
      민진후   민익수   민백분   민기현   민치록
    (고종국구)
         
     
      민진원
    (우의정)
      민형수   민백상
    (우의정)
     
     
      민진영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및 신도비 안내문...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신도비... 묘역에 있다.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역 전경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비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석물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측경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입수도두...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후경...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후경.. 청룡쪽과 백호쪽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 후경.. 묘 앞 명당이 평탄원만하고 조안산이 잘 감싸주는 포근한 곳이다.

    ▼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묘역 오르는 길...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