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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회양공(淮陽公) 조신(趙愼)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4. 10. 6. 09:00
회양공(淮陽公) 조신(趙愼) 묘
조선8대명당으로 소문난 조신의 묘는 깊숙한 골짜기 안에 있어 음기가 무척 강하게 느껴진다. 무학대사가 소점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많은 풍수가객들이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 풍수답사를 단체로 하다보면 버스가 멈춘 곳에서부터 답사가 시작되어 둘러보기 때문에 입구쪽에 있는 문화재나 비각, 비보숲, 연못 등은 많이 놓치게 된다. 이곳은 다행히 덕림병사가 옆에 있어서 같이 둘러볼 수 있었다. 조신 묘는 급경사를 이루는 곳에 바짝 붙여서 용사를 한 곳으로 얼른 봐도 명당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조선8대명당이라고 글을 올리고 옥녀직금형이라는 무학의 야사까지 올리니 그냥 그 견해가 굳어진 느낌이 든다. 이번 답사에서 석초선생님은 명쾌하게 답을 주신다. "옥녀직금형의 요건은, 옥녀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상으로, 주봉(主峰)이나, 주위에 반드시 옥녀봉을 요하며 북(梭)의 형상을 한 산이나 바위 등이 있어야 하고, 실을 적시는 지당수(池塘水)나 연못 등도 구비되어야 하는데 이곳 묘소에서 주봉을 살펴보면 산림이 울창하여 정작 옥녀봉을 분간하기가 어렵고, 북사도 없으며, 지당수 등도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씀 하신다.횡룡에서 귀성과 낙산이 없는 것은 논할 수가 없다. 어느 학회에서 올린 글을 보니 이곳이 횡룡처럼 보이지만 횡룡이 아니고 주맥에서 분기하여 자연스럽게 내려와 끝나는 곳에 묘역이 있고 남은 기운이 주용맥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고 주장한다. 이곳의 등고선 지도를 참고하고 현장에서 확인해보니 억지 주장으로 느껴진다. 석초선생님은 이곳의 형국명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이곳은 전방으로 큰 물결이 찰랑거리듯이 수 겹의 수성체(水星體)가 층층으로 포개져 나열하면서, 마치 밝은 달빛아래에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완사(浣紗)의 형상이 되어,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에 가까운 풍수적 해석이다." 묘 뒤 현무정에 올라 확인해보면 옥녀직금 보다는 완사명월이 더 타당해 보인다.회양공(淮陽公) 조신(趙愼) 묘
조신(趙愼)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본명은 사렴(思廉)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정4품 봉상대부(奉常大夫)가 되어 강원도 북부 회양부(淮陽府)의 부사(府使) 를 지내 '회양공(淮陽公)' 으로도 불린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에게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지위를 추증(追贈)받았다.
충숙왕 때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 右副代言)과 좌상시(左常侍)를 지낸 조염휘(趙炎暉)의 4남 1녀 가운데 셋째, 고성이씨(固城李氏)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조선 건국 이후에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역임한 조안평(趙安平)이며, 작은아들은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지낸 조개평(趙開平)이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에 형인 조사공이 김정, 김흥조, 유사의(兪思義) 등과 함께 신돈을 살해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자 형제가 모두 곳곳으로 흩어져 피신하였다.
조신은 이때 사렴(思廉)이란 이름을 신(愼)으로 바꾸고 둘째아들인 조개평을 데리고 부여의 임천(林川)으로 은거하였으며, 그의 아내인 고성이씨는 맏아들인 조안평을 데리고 친정인 춘주(春州, 지금의 춘천)로 피신하였다.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인용>
태종왕은 은사인 회양공이 세상을 떴다는 말을 듣고 무학(無學:조선 태조의 왕사)을 불러 “묘 터나 하나 잡아드리라”고 하였다. 그에 무학이 덕림에 당도하여 묘 터를 보니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으로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임에 틀림이 없으나 다만 곁에 있어야할 꾸리 물이 없어서 못쓰겠다“하고 허탕을 치고 내려오는데 어찌된 일인지 산을 오를 때는 없었던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다. 그런데 방에서 베를 짜고 있던 딸이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 ”꾸리 물 좀 주세요.“하니 어머니는 딸에게 호통을 치면서 ”저년은 미련하기가 꼭 무학이 같은 년이야! 꾸리 물이 오른 쪽에만 있는 것이냐? 그 왼쪽을 보렴!“하고 딸을 꾸짖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무학이 다시 산으로 올라가 묘 터의 왼쪽을 보니 멀리 아득한 곳에 백마강 물이 맷방석만 하게 비춰 보이는 게 아니던가. 해서 당초에 내려썼던 묘를 한 단계 위로 올려 재혈하였다.
이렇게 묘 터를 잡아준 무학은 한양으로 올라가 태종왕께 복명하였다.
“어떻더냐?” 왕이 물으니 무학이 “한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계룡에서 꽃을 피우고 가야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着根於漢陽 開花於鷄龍 結實於伽倻)”라고 설명하였다.
그 말을 들은 태종왕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무래도 그때까지는 내 자손이 임금노릇을 못할 것이니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다음블로그 정산풍문도장에서 인용>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충절인 조신(趙愼) 선생의 묘이다. 선생의 원래 이름은 사겸이었는데 신돈의 섭정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부여 임천에 숨어 지내면서 신(愼)으로 바꾸었다.
봉상대부 회양부사를 지냈으며 당대의 학자인 이색·정몽주와도 가까이 지냈다. 그는 조선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기도 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다.
묘비는 처음에 후손인 조속(趙涑)이 유적들을 모아 세웠지만 닳은 정도가 심하여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지금의 비문은 후손 조최수(趙最壽)가 글을 짓고 조현명(趙顯命)이 글씨를 쓴 것이다 .
<부여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문화재지정 문화재자료 제119호 문화재명칭 회양공(淮陽公) 조신(趙愼) 묘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고도문화사업소(041-830-2511) ▼ 회양공(淮陽公) 조신(趙愼)의 묘 원경... 급락하는 맥을 받은 묘역은 명당 조건과는 거리가 있다.
▼ 조신(趙愼)의 묘 문화재 안내판
▼ 조신(趙愼)의 묘... 언뜻 보면 유혈로 보이지만 이곳은 큰 와혈(大窩穴)로 보아야 한다.
▼ 조신(趙愼)의 묘역에는 여러가지 악재들이 있다. 뒷쪽에 고압선은 또 무엇인가?
▼ 조신(趙愼)의 묘에는 유난히 석물이 많다. 무엇을 뜻하는가?
▼ 조신(趙愼)의 묘...
▼ 조신(趙愼)의 묘 전경
▼ 조신(趙愼)의 묘 청룡쪽 문인석
▼ 조신(趙愼)의 묘 백호쪽 문인석
▼ 조신(趙愼)의 묘 석물들...
▼ 조신(趙愼)의 구 묘비 전면
▼ 조신(趙愼)의 구 묘비 후면
▼ 조신(趙愼)의 신 묘비 전면
▼ 조신(趙愼)의 신 묘비 측면
▼ 조신(趙愼)의 묘 용맥도... 등고선으로 봐서는 현무정에서 분기한 맥이 곧장 혈을 맺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 횡룡입수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척봉이나 귀성, 낙산등은 보이지 않는다.<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발췌>
▼ 조신(趙愼)의 묘 후경... 멀리 있는 조산이 옥녀봉을 이루거나 현무봉이 옥녀봉을 이룰때 옥녀직금형이 될 수 있는데 이곳은 그런 사격들이 부족하여 완사명월형이 더 어울린다.
▼ 조신(趙愼)의 묘 입수도두 아래에 가을 꽃이 피어 있다. 묘역이 윗쪽에 있고 계곡을 끼고 있어 바람이 무섭다. 그래서인지 묘역에는 석물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 조신(趙愼)의 묘 앞에는 야생 배나무가 한그루 있다. 몸통 부분을 보면 이끼가 잔뜩 끼어 있다. 이 묘역은 대와혈로 아랫쪽으로 수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덕림병사(德林丙舍)
고려의 조신 선생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고려 후기에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원래는 덕림사가 있던 터였고, 사당 왼쪽에 있는 선생의 묘소는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무학선사에게 부탁해 잡은 터라고 전한다.
창건(創建) 연대(年代)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성주산(聖住山) 자락에 자리한 이 지역을 덕림동(德林洞)이라 불러 왔으며, 당시 덕림사(德林寺)가 있던 곳이었으나 고려 봉상대부(奉常大夫) 회양부사(淮讓府使) 조신((趙愼), 생몰연대미상) 선생의 재실(齋室)로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우(祠宇)의 좌편에 자리한 선생의 묘소는 태종(太宗)이 무학선사(無學禪師)를 시켜 잡은 자리라 전해진다.
<부여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문화재지정 문화재자료 제305호 문화재명칭 덕림병사(德林丙舍)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고도문화사업소(041-830-2511) ▼ 조신(趙愼) 선생의 재실로 사용되는 덕림병사(德林丙舍) 문화재 안내판
▼ 조신(趙愼) 선생의 재실로 사용되는 덕림병사(德林丙舍)
▼ 덕림병사(德林丙舍) 전경
▼ 조신(趙愼)의 묘에서 바라본 덕림병사(德林丙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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