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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부여]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4. 10. 7. 09:00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회양공 조신의 묘를 답사하다보니 앞쪽에 덕림병사가 보이고 그 옆에 2기의 묘가 보인다. 얼른 보기에 지각에 쓴 묘 같기에 가보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찾아가기에 따라 나섰다.

    누구인지 모르고 사진만 몇 컷 찍어왔는데 돌아와서 확인하니 낭산서원에 배향된 수죽 조방직과 그의 아들 낙수 조광형의 묘였다. 성의를 다해 사진 촬영을 하지 않아 제대로 된 사진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거의 올리지 않는 묘역이라 올려본다.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조방직(趙邦直, 1574~1637) 조선의 문신(文臣), 학자(學者), 자(字)는 숙청(叔淸), 관향은 풍양(豊壤)이다. 조신의 7대손, 죽계 조응록(竹溪 趙應祿)의 아들로서 약포 이해수(藥圃 李海壽)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약포(藥圃)의 기대가 너무 컸으므로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하(門下)에 가서 성리서(性理書)를 갖추어 배웠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문과에 으뜸으로 발탁되니 고관(考官)이었던 서경 유근(西坰 柳根),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 등이 그 문장을 감탄하여 “이는 문형(文衡: 大提學)의 재목이다”라고 하였다. 괴원(槐院: 承文院)에 선입(選入)되어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가지 일을 대행(代行)하다가 유희분(柳希奮)에게 삭출(削黜)되어 벽사(碧紗)의 찰방(察訪)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전중(殿中)에 이직(移職)되었고, 1614년(광해군 6)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천거(薦擧)되었으나 권병(權柄)을 잡았던 사람에게 거슬리어 곧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이임(移任)시켜 서전(西銓: 兵曹)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 함경도사(咸鏡都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체임(遞任)을 사양했다. 1630년(인조 8)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자(陞資)되었고, 우승지참병형양참의(右承旨參兵刑兩參議)에 옮겨졌다. 1632년(인조 10)에 봉양을 위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곧 바로 체직(遞職)되어 돌아와 은대(銀臺: 承政院)에 들어가 우승지(右承旨)로부터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저서에 “수죽유고(脩竹遺稿)”가 있다.

    <(사)한국서원연합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1574(선조 7)∼?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숙청(叔淸), 호는 수죽(脩竹). 세헌(世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기(德期)이고, 아버지는 장령 응록(應祿)이며, 어머니는 조극근(趙克勤)의 딸이다. 이해수(李海壽)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사간·집의를 거쳐 1633년(인조 11)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1627년이인거(李仁居)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소무공신(昭武功臣)이 되고, 다음해유효립(柳孝立)·정심(鄭沁)의 치옥에 공을 세워 영사공신(寧社功臣)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김집(金集)과 함께 근왕(勤王)하고자 달려갔으나 뜻대로 안 되자, 되돌아와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으며, 병으로 직접 싸우지는 못하고 김집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죽음에 임하여서도 의곡(義穀)을 거두어 병량(兵糧)을 도우라는 말을 남겼다. 성리학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수죽유고』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조광형(趙光亨, 1606~1682) 자(字)는 군실(君實), 호(號)는 낙수(樂叟), 본관은 풍양(豐壤)으로 수죽 조방직(脩竹 趙邦直)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준결(峻潔)하고 기우(器宇)가 염목(恬穆)하고 간정(簡淨)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사모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귀중한 그릇이라 칭찬했다. 계곡 장유(溪谷 張維)가 그의 문장을 살펴보고는 매양 칭찬을 더 하고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써 허여(許與)했으며, 시율(詩律)에는 명성(名聲)이 멀리 퍼져 나갔다. 오직 문사(文詞)를 매우 완미하여 세상과 어긋나서 크고 작은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항상 “주자서(朱子書)”와 “퇴계집(退溪集)”을 좋아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공(公)의 현명함을 듣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1742년에 향사(鄕士)의 공론으로 사랑강(沙朗江) 가에 사당을 세우고 “낭호향현사(朗湖鄕賢祠)”라 편액(扁額)하고 춘추로 향사(享祀)하였으니 이는 현재 낭산서원(朗山書院)의 전신이다. 저서에 “낙수유고(樂叟遺稿)”가 있다.

    <(사)한국서원연합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풍양조씨 회양공파 문중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원경 

    ▼ 7대조 할아버지 조신의 묘에서 바라본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묘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묘 전경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묘...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구 묘비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신 묘비(전후좌우)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묘 백호쪽 석물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묘 청룡쪽 석물.. 뒤로 재실과 7대조 조신의 묘가 보인다.

     

    ▼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묘 아래에 위치한 조방직의 아들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비

    ▼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측후면

    ▼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묘 후경

     

    ▼ 죽계 조응록(竹溪 趙應祿), 수죽(脩竹) 조방직(趙邦直), 낙수(樂叟) 조광형(趙光亨) 3대를 배향하는

    낭산서원(부여군 세수면 수고리)<(사)한국서원연합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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