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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김해]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및 묘소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4. 10. 14. 09:00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및 묘소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할 일이 여러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다른 일로 가보지 못했는데 딸네집을 방문하면서 맘 먹고 찾았다. 이른 봄에 찾았는데 가을이 되어서야 글을 올린다.

    현대사의 희노애락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진영 노무현대통령 생가 봉하마을이다. 그곳에 노무현대통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한쪽을 묵묵히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를 보노라면 마음이 울컥해진다. 아직도 찾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노무현대통령 만큼 호, 불호가 명확한 대통령도 드물 것이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노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색 물결이 아직도 봉하마을 초입부터 펼쳐져 있다. 어찌보면 멋지게 인생을 살다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1946년 8월 6일~2009년 5월 23일. 현대 정치인.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진영읍(進永邑)이다.
    증조부는 노응규(盧應奎)이고, 조부는 노학용(盧鶴容)이다. 부친 노판석(盧判石)과 모친 이순례(李順禮)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인은 권양숙(權良淑)이다.
    유신 시절에 막노동과 사법시험 공부를 병행하여 네 번째 도전을 한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고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1978년 5월 7개월 만에 사임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다.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았으며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여는 시민‧노동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재야에서 인권 옹호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노무현은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부산 동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988년 11월 제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의 증인들을 상대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의원은 죄가 없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파격적 행동을 해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91년 6월 시‧도 지방의회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하자 야권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해 9월 김대중(金大中)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 민주당은 의원 수가 늘어났다. 이로써 민주당은 김대중과 이기택의 공동대표체제가 구축되었으며 한국 정통 보수야당의 계보를 이어가게 됐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자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에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종로구를 포기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 북‧강서 을 지역구의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 당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를 ‘바보 노무현’ 또는 ‘노짱’이라 부르며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약칭 노사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국회의원 낙선 후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당정치사상 처음 도입된 국민경선제에서 이른바 ‘노풍(盧風)’을 일으키며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국민승리21의 정몽준 후보와의 야권후보단일화 경쟁에서도 승리했다.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정몽준 의원은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흔들리기도 했으나 오히려 지지자의 결집과 동정표를 불러일으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에 57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대한민국 헌법 위반으로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이후 제16대 국회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정당들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의 호된 심판에 직면해야 했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언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인권 신장에 기여하였다는 평가가 있고, 탈(脫)권위를 실천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친환경 농업과 농촌 환경 개선 등에 힘썼으며 봉하마을은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다.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盧建平)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며 노무현도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 영결식은 서울 경복궁에서 진행되었고, 시민들이 준비한 노제가 서울광장에서 열려 추모 인파가 서울특별시청부터 서울역까지 몰렸다. 유해는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한 후에 김해 봉하마을에 안치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및 묘소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경상남도, 노무현재단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원경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옆으로 시설들이 많다. 우측으로 사자바위가 보인다.

    ▼ 길 왼편으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집과 앞쪽으로 사자바위가 보인다. 사자바위의 형상이 좋지 못하다.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안내판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안채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 아래채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생가에서 바라보이는 사자바위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 사자바위 아래에 있다.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에서 바라본 입구... 바닥은 국민들이 보내온 추모글구로 채워져 있다.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에서 바라본 숙소 뒤 현무봉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묘소와 최후를 맞았던 부엉이 바위...

    ▼ 부엉이 바위... 

    ▼ 사자바위... 사자는 낮에 가장 강한 동물이고 부엉이는 밤에 강한 새이니... 밤과 낮을 가까이에서 지켜주는 격이다.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추모의 집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추모의 집 입구

    ▼ 봉하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사자바위... 저 바위의 강한 기운으로 대통령까지 되었겠지만 대통령이 끝나고 나서는

    그곳에 터를 잡으면 사자바위 기운이 좋지 않게 작용을 하게 된다. 형상이 좋지 못하다.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추모의 집 안의 동상

    ▼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추모의 집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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