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휴를 맞아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남도 답사를 다녀왔다.
남도 답사1번지.....
땅끝마을 해남의 유적지와 고산, 다산의 유적지를
돌아오는 이번 여행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사실 고등학교때부터 이곳을 답사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건만 매번 그 지척까지 가놓고서는
시간이 없다, 나혼자 행동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냥 되돌아서기를 수 회....
이제 맘먹고 가고자하였더니 때아닌 철도파업이 가로막고....
그래도 어찌 내 맘까지야 막을수 있으랴.....
다산초당, 녹우당, 대흥사, 보길도를 도는 여행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했건만 너무 기다려온 여행이라 그런지
괜스레 마음 한켠이 흥분되어옴을 막을길이 없다.
사실 유홍준 교수의 우리문화유산 답사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이 강진 해남 유적지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남도답사 1번지를 남한 답사1번지로
부르고 싶을 정도라는 것이다.
지난날 오지중의 오지로 유배지였던 그곳이 답사1번지로
꼽히는 이유는 다산 정약용의 18년간의 유배지가 있고
고산 윤선도의 고택과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여러 유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외에도 무위사의 극락전을 비롯 많은 역사유물과
고려 도공들의 삶의 체취가 묻어나고 저항과 항쟁의 땅에 서려있는
살아있는 혼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점심녁에 나주역에 도착했다.
나주역은 예전의 조그만 역이였는데
새로 근사하게 역사를 지어 새로이 방문하는
방문객을 흡족하게 만들어 줬다.
한없이 펼쳐진 나주 배나무 과수원을 옆으로 끼고
남으로 내달리는 차창에서
갑자기 李花에 月白하고....라는 싯구를 떠올린다.
배꽃이 화사하게 핀 한달 후 쯤의 이곳을 떠올려본다.
약 1시간여 달린끝에 갑자기 나타나는 장엄한 산!
허허벌판에 저렇듯 큰 산이 있을까 싶게
웅장한 산이 들떠있던 내 마음을 침잠하게 만든다.
이곳이 바로 영암 월출산이란다.
시간 관계상 영암에 대해서는 깊게 답사하지 못했지만
영암의 구암리 옹기가마터에 대해 그 전날 N세대강의에서
들은바 있어 그곳 도자기 박물관으로 방문하여
연구관으로 부터 도자기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석기시대부터 고려청자로 이어지는 옹기, 도자기의 과정과
그 기법등 도자기에 문외한인 나를 깨우치는데는 충분한
설명이었고 느낀바가 자못 크다.
혼자하는 여행은 눈으로 보는 재미가 있고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깊은 생각을 갖게하는데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지만
뭔가 알려고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위한 답사에는 적절하지
못한것 같다. 사람은 아는만큼 느끼고 느낀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답사만큼은 꼭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답사전에 그곳 유물과 유래에
대해 알고가는것은 필수에 가깝다. 우리 마눌의 말에 의하면
놀러가는 여행에서까지 머리아프게 공부해야되냐고 하지만
답사는 순수여행하고는 다소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영암 월출산을 끼고 구암리까지 가는길은
전주군산간 전군가도 이상으로 벛꽃나무가 터널을 이루어
그 또한 봄철이 기대된다. 4월초부터 왕인박사 기념축제가
이곳에서 벌어진다고 하니 자못 기대된다.
구암리를 벗어나 월출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강진으로
들어가는데 옛날 다산이 강진으로 귀양오면서 월출산을
돌아보지 말랬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월출산이 한양
도봉산과 흡사 닮았다 하여 그런 글을 지었다한다.
영랑 김윤식의 생가를 지척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곧장 월출산 무위사로 갔다.
무위사에는 국보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이 있는 사찰이다.
가이드로 부터 절에대한 자세한 설명과 부처님에대한 설명,
사천왕에 대한 설명 등 내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고
꼭 알고 싶어하던 부분을 다소나마 충족시켜줬던 가이드에
새삼 고마움을 표한다. 가이드는 여행지의 역사와 유물에
대한것은 어느정도 알지만 깊은 질문이 나오면 난처해한다.
그도 그럴것이 많은 지식이 요구되는 문화사에 대한 것까지
답사객들은 요구하지만 가이드가 그것까지 알수야 없지 않은가..?
가이드가 건축물에대해 답변을 못하길래 내가 나서서
좀 아는체를 했더니 모두들 고마워 한다...ㅎㅎㅎ
無爲寺는 정말로 할일이 없는 그런 절집마냥 너무 조용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극락보전 또한 절집에
잘 어울리게 아담하면서도 그 운치를 잘 유지하고 있다.
극락보전을 근세(1974년)에 와서 수리하면서 그곳의 벽화를
따로 들어내 벽화보존실에 비치해 놓고 있었는데 500년
이상이 된 그림이 별로 큰 상처없이 잘 보존되어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도 근자의 절집 대형화의 바람으로
연일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조용한 무위사를 공사장으로
딸바꿈시켜 놓은 것이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백련사를 그냥 지나쳐야 되는
심정을 해아렸는지 가이드가 잠깐만 들렀다 가잖다.
백련사 초입에는 선운사 동백림처럼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동백림이 있는데 선운사 동백림보다야 훨씬 못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것을 어찌하랴?- 동백림
한 가운데로 산책길이 나있어 동백꽃과 하나가 될수있는
좋은 시간을 갖을수 있다는데서는 선운사 동백보다 더 인간
적이고 정감이 있는곳이다. 선운사 것도 그런 산책로 하나
정도 만들면 안되는 것일까...?
미당의 말처럼 동백을 보러 백련사?에 갔더니 동백은 너무 일러
쬐금밖에 안피웠고...... 백련사도 둘러보지 못한채
멀리서 절집 외형만 보았는데 옛날 고려 무신정권때 확장된
절집이라더니 서있는 자태가 자못 위압적이다.
다산과 혜장스님의 담소를 귓전에 두고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는 산책길이 나있는데 그 옛날 다산이
이 산책길로 해서 혜장스님을 뵈러가던 길이다. 원래 답사를
제대로 할려면 이길로 해서 다산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는데
일정이 있는관계로 다산초당으로 직접 차를 몰고 들어갔다.
다산초당 입구에는 다산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곳 말고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의 고향에는 생가와 묘가 있고
유물전시관이 있다. 그러고 보면 다산은 유물전시관도
두개씩이나 되는 것을 보니 대학자임에 틀림없다보다....
유물전시관에서 다산의 주요저서들을 보고 그의 탁월한 능력을
두루 훑어보면서 비디오 상영관에서 그의 일생을 볼 기회를
갖게되는데 이런 사전지식들이 답사의 맛을 더한층 나게한다.
다산초당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가슴이 마구 콩당콩당한다.
그 옛날 고교시절 마음적으로 그 분의 철학을 존경하고
삶에 의문과 유배지의 곤궁을 모두 한자리에서 볼수 있다는
마음에서인지 한걸음에 가파른 길을 내달려 초당으로 진입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대가 크면 실망 또한 큰 법.
초당으로 가서보니 초당은 아니보이고 와당(기와집)만 깊은
산중에 버티고 서있다. 그래도 유구한 것은 바위라더니
다산의 체취가 묻어있는 정석바위와 차를 다려마셨다는
다조라는 바위만큼은 그 시대의 아픔을 전해주는 것만 같다.
다산초당에 가면 현판에 관심을 갖어야 한다. 추사의 茶山草堂
글씨와 寶丁山房 글씨를 보게되고 다산이 쓴 茶山東菴은
답사객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고 할까..... 옆으로 돌아가면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구강포(강진만)의
멋진 풍광이 지친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원래 이곳엔
정자가 없고 작은 바위만 있었으나 후세에 세웠다한다.
그래도 다산선생도 당시에 마음을 정리하고 깊은 생각에
잠길때는 틀림없이 이곳에서 멀리 구강포를 바라보며 시름을 달랬으리라......
다산의 유배생활을 보여주는 그림 한폭이 유물전시관에 모사로
전시되어 있는데(원본은 고려대박물관 소장) "매화와 새"라는
그림이다. 그 내용을 보면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날아든 새에게 조차 같이 살자고 하는 그 심정을 알것도 같다.
그 옆에 작게 쓰인 이 그림의 사연인즉 부인 홍씨가 보내준
치마가 색이바래 그걸 잘라 4첩을 만들어 두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라고 적혀있는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었나 하는것을 느낄수 있다.
다산초당에서 잠시 머물며 그분을 생각해본다. 시원한 바람이
솔숲에서 나와 가파른 길을 올라온 나그네의 거친숨을 잠시
골라준다.
내가 이런곳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마눌말이 이런곳에서는
잠시 다녀간다고 생각하면 좋지만 여기서 살라고 하면 하루도
살지 못한단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딘지 정감이 없고 찌든 때가
덕지덕지 묻은 세속에 살고있다는 우리네 삶을 대변한것 같아
씁쓸해진다.
강진땅을 벗어나며 가이드가 강진땅의 풍수를 말해준다. 강진땅은
소의 형상이라한다. 소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이 영랑생가가
있는 곳이고 해남땅으로 넘어가는 곳이 곧 소의 음부가 자리
잡은 곳이란다. 그래서 그곳에는 인물이 나오는데 많은 예술가를
배출했고 또한 경제계에도 인물이 있었는데 옛날 000 연탄사장이
이곳 출신이란다....ㅎㅎㅎㅎ
출처 : 불혹전후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