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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릉여행(5)...비각과 부속건물들..
    답사는 즐거워/조선왕릉답사 2004. 10. 30. 00:29

    왕릉의 구조


     

     


     

    1) 금천교(禁川橋)

    2) 홍살문[紅箭門]

    3) 판위(板位)

    4) 참도(參道)

    5) 수복방(守僕房)

    6) 비각(碑閣)

    7) 석계(石階)

    8) 정자각(丁字閣)

    9) 예감(坎)

    10) 산신상석(山神床石)

    11) 사초지(莎草地)

    12) 석마(石馬)

    13) 무석인(武石人)

    14) 문석인(文石人)

    15) 장명등(長明燈)

    16) 혼유석(魂遊石)

    17) 망주석(望柱石)

    18) 석양(石羊), 석호(石虎)

    19) 석난간(石欄干)

    20) 봉분(封墳)

    21) 곡장(曲墻)





    비각(碑閣)





    정자각 오른쪽(동쪽)에는 비각(碑閣)이 있는데 이곳에는 릉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비석이 있습니다. 구영릉(舊英陵:세종대왕의 영릉이 여주로 천장되기전 지금의 헌릉 옆에 
    있었음) 조성시 까지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나 그 이후 시기에는 간단한 표석(表石)만을 
    세웠습니다. 즉 세조 이전에는 왕의 치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같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이후 
    왕의 릉에는 신도비가 없습니다. 
    이는 세조대왕이 사치를 줄이고 제례를 간소화하라는 명에 따라 바뀌어진 것인데 임금의 
    자취는 국사(실록)에 실려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상당수의 비석은 능이 조성될 당시에 세운 것이 아니라 나중에 세운 것들이며 특히 영조, 
    고종 때에 많은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세조이후의 왕릉은 릉원 뿐 아니라 석물들도 많이 간소화, 소형화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조이전의 왕인 세종대왕 영릉에는 왕의 신도비가 없는데 이는 천장하는 과정에서 신도비를
    땅에 묻어두고 새로이 비석만 설치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세종대왕 신도비와 석물들은 발굴되어 지금 세종대왕기념관(홍릉)으로 옮겨 현재 
    전시되고 있습니다.
    고종 이후에는 왕이 아니라 황제로 칭하게 됨에 따라 선대왕들을 황제로 추존하게 됩니다.
    참고로 개국왕은 자신의 4대를 왕으로 추존할 수 있고 개국황제는 자신의 7대를 황제로 
    추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를 비롯 고종 앞의 7대선대왕(진종,
    장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을 모두 황제로 추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 왕릉에는 
    대한제국 때의 비석이 하나 더 건립되어 두개씩이 되었습니다.
    

    비각 아래에 있는 수복방과 반대편 수라간

    비각 아래쪽에는 부속 건물들(수복방, 수라간, 재실)이 있었으나 훼손되어 터만 남은 곳이 
    많으며, 수복방은 복원된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여기에는 원래 고방(庫房)이라고 하여 제기를 보관하는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고방(庫房)이 나중에 제향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 및 능참봉과 수릉군이 머무는 
    수복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수라간은 여주의 영릉(4대 세종)과 화성의 융건릉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영릉은 1970년대에 왕릉복원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져  왕릉의 모든것이 다 갗춰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왕릉 답사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용어설명☆ 
     ★ 수복방(守僕房) : 능지기가 머무는 방으로 정자각 오른쪽 비각 아래쪽에 있음.
     ★ 수라간(水喇間) : 제례 음식을 차리는 부엌으로 정자각 왼쪽에 있음.
    

    소전대석(헌릉, 건원릉)

    세종 2년과 4년의 헌릉(獻陵) 조성 기록을 보면 망주석 서쪽과 정자각의 북서쪽에 
    소전대석(燒錢臺石)을 두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소전(燒錢)이란 혼령이나 신령을 달래기 
    위하여 종이돈[紙錢]을 사르는 의식을 말한다고 합니다. 
    오례의에 소전대석의 높이는 1척 5촌이고 위아래가 모두 모가 졌는데 사면이 각각 
    3척 1촌이며 허리에 구름 모양을 새긴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 조성된 왕릉(태조, 태종)에는 소전대석(燒錢臺石)을 볼 수 있습니다.
    

    예감과 산신석

    세종실록 오례의 치장(治葬)조에는 정자각의 서북쪽에 소전대석(燒錢臺石) 대신 예감(예坎)
    이라는 석함(石函)을 둔다고 하였습니다. 
    예감은 제사가 끝난 뒤 축폐(祝幣)를 그대로 묻거나 혹은 이를 불살라[燎] 재를 묻는 장소
    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묻고 영조(英祖) 이후에야 비로소 불사르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자각의 북동쪽에는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신상석(山神床石)을 설치하기도 하는데요 
    산신상석(山神床石)은 대부분 아무런 조각이 없는 단순한 직육면의 돌판이며 산신제를 
    지낼 때 제물을 진설하는 곳입니다. 
    

     ☆용어설명☆ 
     ★ 예감 : 정자각 왼쪽(북서쪽) 위에 위치하고,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태우는 곳.
     ★ 산신상석(山神床石) : 정자각 오른쪽(북동쪽) 위에 위치하고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
    

    재실과 금천교

    왕릉의 외곽에는 재실(齋室)이 있습니다. 
    능 하나가 조성되면 재실을 짓고 종9품 능참봉 1명과 능관리인을 70명씩이나 배치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제관이 목욕재계를 하고 임금이 옷을 갈아입기도 하는  곳입니다. 
    재실을 나와 능역(陵域)으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금천교(禁川橋)입니다. 
    풍수지리상 왕릉의 앞쪽으로는 반드시 몇개의 굽이치는 작은 물길이 있는 법인데 이 작은 
    냇물을 왕궁 앞에 있는 물길의 이름을 따라서 금천(禁川)이라고 부르며 금천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고 합니다. 금천교는 영릉(寧陵)과 같이 형식을 갖추어 크고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직사각형의 돌판을 냇물 위에 얹어 놓는데 불과합니다.
    

     ☆용어설명☆ 
     ★ 금천교(禁川橋) : 금천교 밑으로 흐르는 물을 건너면서 온갖 더러운 것들을 씻어 버린다는 의미
     ★ 재실(齋室) : 능참봉과 관리인이 머무는 곳
    

    릉의 구조도를 보면서 따라오셨나요??? 
    지금까지  정자각 아래쪽을 모두 설명했습니다. 이제 다음부터는 릉원에 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좀 복잡한듯 하면서도 정형화되어 있어 한번만 익혀놓으면 전문가 수준이 
    될 수 있으니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인제 조선왕릉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들......배 곯아 죽게 생겼군.....ㅎㅎㅎㅎ♥돌♥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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