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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성)형조판서 오두인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8. 13. 10:00

    형조판서 오두인 묘 및 신도비

     

    오정방 묘역 입구에는 덕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금성체의 바리봉아래 포근히 자리잡았다.

    숙종때의 충신 오두인을 모신 사당인데 대원군의 서원철폐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비가 너무 내려 덕봉서원은 들르지못하고 차창밖으로 스쳐지나가기만 했는데 주산의 모습과 앞쪽의 

    명당이 참으로 좋아 보였다. 날씨 좋은 날 다시한번 답사를 해야겠다.

    오두인 묘역에는 안성 해주오씨 입향조인 오경운, 오두인의 부친인 오숙, 그리고 맨 위에 오두인의 묘가 

    있다. 오두인 묘의 백호자락으로 뻗은 능선을따라가면 그의 생부인 오상의 묘가 돌혈로 자리하고 있다. 

    안성 해주오씨 정무공파 가계도
    오경운   오수억   오정방   오사겸   오숙 입양 오두인
    직장 (양자) 병마절도사 용인현령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오수천 오상 생부  
    (생부) 이조판서
     
    오빈
    공조참의

    오두인(吳斗寅)

    1624년(인조 2)∼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이조판서 상(翔)의 아들로 숙부 숙(䎘)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병조참판 성길(成吉)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650년(효종 1) 지평을 거쳐 1656년 장령, 1661년(현종 2) 헌납·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에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도중 파주에서 죽었으며, 그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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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유적 제23호
       오두인 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산47-1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산47-1(단체답사로 네비게이션 확인못함)
       해주오씨 정무공파


     

     

     

     

     

     

     

     

     

     


    ▼ 충정공 오두인 선생 신도비 안내판  

    ▼ 충정공 오두인 선생 신도비... 빗줄기가 세차다. 

    ▼ 충정공 오두인 선생 신도비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 전경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비....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 백호쪽 문인석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 청룡쪽 문인석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 석물들...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 후경...  

     

    ▼ 충정공 오두인 선생 묘역에 있는 해주오씨 입향조 오경운 선생 묘

     

     

    오숙(吳肅+羽)


    1592년(선조 25)∼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아버지는 종친부의 전부(典簿)였던 사겸(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시중(李時中)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약관에 과명(科名)을 날리었고, 곧 승문원의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당시 문장가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정구(李廷龜) 등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문(陳奏文)을 초안하였는데, 그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의 천거를 받아 다음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에 승진하였다.
    그뒤 예조좌랑을 지내다가 조정의 난정(亂政)을 볼 수 없어 벼슬을 버리고, 장유(張維)·이명한(李明漢) 등과 교유하며 삼각산에서 독서도 하였다.
    1619년에 병조좌랑이 되었고, 이때 강홍립(姜弘立)이 후금군에 항복을 알리는 부경진주사(赴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갔다왔으며, 다음해에 괴산군수가 되어 많은 기민(飢民)을 구하였고, 그해 가을에 순검사종사관으로 삼남을 순찰하였다.
    1621년에는 종사관으로 원수 한준겸(韓俊謙)을 따라 관서(關西)의 군무(軍務)를 돌아보고 돌아와 삼각산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문하의 8학사의 한 사람이라 하여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곧 사헌부지평으로 옮겨서 풍기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우고, 성균관직강·수찬·교리·헌납이 되었고, 문학지신으로 뽑혀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그 공으로 병조참지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사은 겸 주청부사가 되어 해로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6년에 청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동부승지로서 정묘호란을 당하여 왕을 강도에 호송하였고, 우승지·사옹원제조·상의원제조·형조참의·여주목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 좌승지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고, 1633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마침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유진(留鎭)하여 일어난 대청관계를 원만히 해결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로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송도에서 죽었다. 문장이 간결 명료하였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났다.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 4권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오두인 선생의 부친 오숙 선생 묘  

    ▼ 오두인 선생의 부친 오숙 선생 묘비 

    ▼ 오두인 선생의 부친 오숙 선생 묘갈 

     

    ▼ 오두인 선생의 생부인 오상 선생 묘... 돌혈(突穴)  

    ▼ 오두인 선생의 생부인 오상 선생 묘갈

    ▼ 오상 선생 묘 석물 

     

    ▼ 오상 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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