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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성)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영의정 심온 부인)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8. 16. 10:00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를 찾았으나

    입구 문이 굳게 닫혀 있고 관리인은 전화를 미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나타났는데 그나마 열쇠를 잃어버렸는지

    이것 저것 마구 맞춰보지만 맞는게 없는지라...

    결국 쇠톱으로 자물쇠를 자르고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삼한국대부인 묘소 앞에서 앞쪽 금광저수지 너머 조산의 모습이 아주 좋은데

    비로 인해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입수처를 올라 용맥을 따라 과협 속기처까지 다녀왔는데

    뚜렷한 음맥(위로 솟구친 모습)으로 힘있게 내려오고 있었다.

    또한 앞쪽의 금광호수 건너편의 조안(朝案)이 음래양수(陰來陽受)가 되어 응기(應氣)한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

     

    안효공(安孝公)의 배위(配位)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서 소의공(昭懿公:이름은 安天保이며 領敦寧府事를 역임)의 따님이시다. 조부(祖父)인 순성군(順城君)양정공(良定公:이름은 安千善)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증조부(曾祖父)인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문의공(文懿公:이름은 安文凱)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분으로서 고려말엽의 명문대가였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께서는 안효공(安孝公)과 결혼하시어 삼남육여(三男六女)를 낳아 기르셨는데 맏따님(후의 소헌왕후)이 1408년(太宗8年 戊子) 2월16일 충녕대군(忠寧大君:후의 세종대왕)에게 출가하시자 순흥군부인(順興郡夫人)의 직첩을 받으셨다. 

    1418년(태종18년 戊戌)8월8일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卽位)하자 안효공께서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의 봉호를 받으시고,순흥군부인께서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職牒)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해 안효공께서 무술옥사(戊戌獄事)에 연루되시어 억울하게도 화를 입게 되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께서는 직첩을 삭탈당하시고 천안(賤案)에 등록되시어 천민(賤民)으로서 나이어린 자녀들과 함께 허다한 수모를 겪으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안(天安)고을의 관비(官婢)로 되셨다가 의정부(議政府)다모(茶母)로 옮겨졌는데 사실상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8년후인 1426년(世宗8年 丙午)에 우의정(右議政)이직(李稷)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왕비의 어머니가 천안(賤案)에 올라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니 직첩(職牒)을 돌려드려야 옳다.」고 상계(上啓:왕에게 건의하는 일)하였다. 이때 세종대왕께서는 「돌아가신 상왕께서도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며 도승지(都承旨)곽존중(郭存中)에게 영(令)을 내려 그해 5월17일에 면천(免賤)되는 동시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직첩을 돌려 받으시어 명예를 회복 하셨다. 또한 세종대왕의 배려로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친정에 가셔서 8년만에 모녀간의 눈물겨운 상봉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삼한국대부인께서 궁중에 자유로이 출입하며 소헌왕후와 자주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었다. 

    1444년(世宗26年 甲子) 삼한국대부인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소헌왕후께서는 문병(問病)하시고 전의(典醫:궁중의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케하고, 한편으로는 승려(僧侶)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도록 하는등 지극한 효성(孝誠)을 다하였다고 전한다. 그러함에도 삼한국대부인께서는 그해 11월24일에 별세하셨는데 이때에도 소헌왕후께서는 왕세자(王世子)들과 함께 거동하시어 치제(治祭) 하셨으며, 조정에서는 예조판서(禮曹判書)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예장도감(禮葬都監)으로 임명하여 다음해 2월28일에 水原市 二儀洞 산의실의 안효공 묘역에 예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삼한국대부인께서는 44세에 세상을 뜨신 안효공보다 26년을 더 오래 사셨으니 70세이상 장수 하신 것으로 판단할수 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467년(世祖13年 丁亥)5월3일에 세조의 왕명에 의해 삼한국대부인의 묘소는 산의실에서 안성군 금광면 오흥리(安城郡 金光面 五興里)능말에 천장(遷葬)모시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성의 삼한국대부인 묘소는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로 지정되어 관청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안효공종회(安孝公 宗會)주관아래 1988년에 현대식 건물로 재실(齋室)경모재(敬慕齋)를 건립하였고, 1992년에는 둘레석을 설치하고 사초를 드리며 묘역주변을 석축하고 성묘로(省墓路)를 단장하는등 대대적인 묘역정화 공사를 완성하였다. 매년 묘제(墓祭)는 음 3월14일과 9월14일에 후손들이 모여 절사(節祀)를 받들고, 기제(忌祭)는 음 11월24일에 산의실의 사당에서 봉행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른 세조(世祖)의 영(令)에 의해 매년 한식과 추석에 조정에서 향(香)과 축문(祝文)이 내려지고 안성군수(安城郡守)로 하여금 관청에서 마련한 제물로 제향을 받들도록 한 제도가 지켜져 왔었다. 

    <청송심씨부사공파종회에서 발췌>


























































    심온(沈溫)

     

    미상∼1418년(세종 즉위).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세종의 장인이며,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아들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왕조 창업에 참여하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1408년(태종 8) 그의 딸이 충녕군(忠寧君)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성을 침탈하고 병기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 박영우(朴英祐)를 파직시키고, 이어서 대사헌이 되어서는 관기확립에 힘썼다.

    1414년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에 의하여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사업에 이바지하였고, 이어서 호조판서·좌군총제·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행동에 연루되어 대간에 의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세종 즉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의 동생 정(泟)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같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訔)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죽음에 임하여 유언으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 당부하니, 오랫동안 지켜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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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유적 제30호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 32-1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 32-1(단체답사로 네비 사용 못함)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안내판..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를 오르는 길.. 비가 와서 상당히 미끄럽다.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사진 찍기위해 앞서가는데 썩 내키지 않는다.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아랫쪽에 있는 묘의 문인석... 어두침침한게...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전경..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묘제가 조선 초기 형태다..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백호쪽 석물...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청룡쪽 석물...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장명등...

    ▼ 백호쪽 문인석...

    ▼ 청룡쪽 문인석..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비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입수처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용맥을 따라 올랐다.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후경... 앞쪽 조안산이 안보인다.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조안산.. 묘에서 내려와서 찍었다..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후경... 조안산은 받아주는 형태 즉 음래양수의 형태다.(석초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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